세상과 단절된 은둔과 좌절의 정원,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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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 

 

약 500년 전인 1519(중중 14) 11, 열일곱 나이의 어린 수재가 전남 능주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겪었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그의 스승 조광조가 임금의 배신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것이다. 하늘과도 같았던 스승이, 또 다른 하늘이었던 임금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열일곱 어린 제자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이후로 그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다. 늘 마음을 맑고 단정하게 여미고 몇몇 친구들과의 교류 외에는 세상과 단절한 채 40년 가량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했던 일은 오직 하나, 평생을 들여 고향 땅에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정원을 꾸몄을 뿐이었다. 이 정원이 바로 지리산 자락이 끝나는 담양 땅에 조성된 양산보의 소쇄원이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1500년대 초 양산보에 의해 조성된 정원으로, 보길도의 세연정 그리고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전통정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특징은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대로 살리는 데 있다. 일본이나 중국 정원은 주변 풍경에 손을 대서 인위적인 풍경을 만들지만, 우리의 전통 정원은 주변 자연을 그대로 정원의 풍경으로 삼는다. 마음에 드는 풍경 속에 정자를 하나 세우고, 그 풍경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전통정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자연스러움을 소중히 여겼다. 이렇게 자연의 경치를 그대로 정원 풍경으로 삼는 것을,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차경(借景)이라 하고, 그 자연 정원을 원림(園林)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 풍광을 그대로 살린 대표적인 정원이 바로 소쇄원이다. 울창한 대숲은 사람이 발을 들이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고,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바위를 타기도 하고 이리저리 휘어지기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제 갈 길을 간다. 울창한 대숲과 작은 계곡은 소쇄원으로 인해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소쇄원에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파른 땅에 낙은 축대를 쌓았고 계곡에 나무다리를 놓았으며, 흐르는 물을 조금 빌려 작은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또 제월당과 광풍각 같은 정자가 들어섰고, 흙담을 쌓아 소쇄원을 구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인공물들은 자연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피해 자리를 잡았다. 이런 까닭에 소쇄원의 구조물들은 무질서하고 산만하며 또 왠지 모르게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조성된 탓에, 소쇄원에서는 시선을 고정시킬 만한 포인트가 없다. 그러니 만일 누군가 소쇄원에서 멋진 풍경 사진을 건질 요량이라면, 그냥 포기하시라고 나는 말하겠다..

소쇄원은 애초부터 사람의 눈을 만족시키려 만들어진 정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소쇄원을 읽어내는 데 필요한 감각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소쇄원은 눈으로 훑어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소쇄원의 이런 독특한 개성 때문에 어떤 이는 소쇄원에 감격하고 또 어떤 이는 실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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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 소쇄원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연못으로 물을 대는 수로이다. 계곡에 흐르는 물을 가늘고 긴 나무 기둥을 반으로 잘라서 수로로 쓰고 있다. 소쇄원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다고 한다. 15살 때 한양으로 올라가 당대의 대 유학자였던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7살 때 현량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해는 무슨 까닭인지 발표 후 합격자를 다시 줄였는데 이 과정에서 양산보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를 애석히 여긴 중종이 친히 어린 양산보를 불러 지필묵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곡절 끝에 과거에 탈락했지만 양산보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이미 총명함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해 양산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큰 일이 벌어졌다. 바로 기묘사화가 터져 스승인 조광조가 전라도 능주로 유배된 것이다. 당시는 크고 작은 사화가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사화(士禍)란 사림 출신의 관료들이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척 세력에게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조선이 안정되면서 초야에 묻혀 있던 사림의 학자들이 과거를 통해 조정에 진출했는데, 이들은 기존의 보수세력이었던 훈척(공신이나 외척의 집안) 세력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그러자 훈척세력은 이런저런 사건을 구실로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죽이거나 유배 시키는 사회를 일으켰다. 잇따라 사화가 벌어지자 사림의 학자들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아예 관직에 나갈 생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본 양산보 역시 다시는 한양에 발을 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열일곱의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자 스승을 따라 능주로 내려가 스승을 수발했다. 조광조는 중종과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에 박차를 가했던 인물이었다. 왕도정치란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 사회, 즉 성리학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치였다.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 임금이 덕()을 행함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을 교화시켜 세상을 편안케 한다는 사상이었다. 중종은 조광조에게 왕도정치의 확립을 부탁했고,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기득권 세력인 훈척 세력과 지난한 싸움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중종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훈척세력의 편을 들어 조광조를 유배시켜 버렸다. 중종의 속마음은, 조광조가 개혁을 통해 훈척세력의 힘을 꺾어 주기만을 원했지, 굳이 백성을 위한 개혁까지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는 그래도 한때의 동지였던 중종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능주에 있던 조광조에게 내려온 것은 해배 교서가 아니라 사약이었다. 중중이 개혁의 동지였던 조광조의 목숨까지 거둬 버린 것이다.

열일곱 어린 양산보에게 스승 조광조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임금 앞에서도 추호의 물러섬이 없었고, 말 한마디로 전국의 사림을 호령하던 거인,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 사소한 흐트러짐도 없었고, 말과 행동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던 철인, 그리고 흠모하고 존경했던 스승 조광조가 임금의 배신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열일곱 양산보는 스승의 죽음을 보고 미련없이 세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리고 약 십 년에 걸쳐 은둔의 땅 소쇄원을 조성하고 꽃과 나무를 벗삼아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소쇄원이 외롭지만은 않았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세우자 이 일대의 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소쇄원 근처에 정자를 짓고 눌러앉은 사람도 있었고, 서로 인척 관계나 사제 관계를 맺어 친분을 돈독히 한 사람들도 있었다. 강 건너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는 양산보의 외숙이었고, 면앙정가로 유명한 송순은 양산보의 이종사촌이었으며, 을사사화 때 낙향한 대학자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이었다. 또 을사사화 때 낙향한 임억령, 퇴계 이황과 7년간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기대승,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 김윤제의 제자인 김성원과 정철 등이 바로 소쇄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학자들이다. 이들은 소쇄원을 중심으로 시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지냈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였던 이들이 소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소쇄원은 은둔의 땅에서 다시 전남 성리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김윤제의 환벽당, 김성원의 식영정, 송순의 면앙정, 정철의 송강정 등이 세워져, 이 일대가 커다란 정자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호남 사림의 중심이 되었던 소쇄원은 양산보가 죽고 약 30년 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에 들어온 왜군이 소쇄원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후 양산보의 후손들이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 지금의 소쇄원이다.

현재의 소쇄원은 약 1,400평 정도의 아담한 규모이다. 그러나 이는 본래 소쇄원의 내원에 해당하는 구역이었고 옛 외원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외원에는 소쇄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는 야산처럼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작은 소쇄원에도 양산보 당시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어서, 옛 소쇄원의 정취를 느끼는 데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500년 전 은둔의 땅이자 대학자들의 교류처였던 소쇄원은, 이제 사시사철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담양의 명소가 되었다. 소쇄원으로 들어서는 길은 소슬한 대나무 숲길이다. 대숲은 바람도 지나기 힘들 정도로 농밀하지만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조금만 걸으면 대숲이 열리며 소쇄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어지럽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소쇄원의 첫인상은 다소 산만하다. 왼쪽 아래로 계곡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있지만 나무다리를 외면하고 곧장 가는 것이 소쇄원을 돌아보는 순서이다. 이 길을 가면 길과 나란한 흙담이 있다. 돌을 박아 심지로 삼은 흙담인데, 담이 있어야 할 자리도 아니고 완전히 담을 둘러친 것도 아니어서 역할이 모호하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경계를 구획하기 위한 담이다. 이 담을 경계로 소쇄원의 내원과 외원이 나뉘는 것이다.

담 안쪽에는 초가지붕을 얹은 1칸짜리 허름한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가 대봉대(待鳳臺)이다. 대봉대(待鳳臺)봉황을 기다리는 자리란 뜻이다.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소쇄원의 주인은 누구를 기다리느라 대봉대를 만들었는지, 그에게 과연 누가 봉황이었는지, 대봉대 앞에 서면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조촐한 대봉대를 보면 그가 기다리는 봉황은 위풍당당하고 시끌벅적한 인물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소박한 대봉대에 어울릴 만한 고요하고 깊은 울림을 지닌 인물이 아닐런지. 아니면 임금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스승 조광조를 기다렸던 건 아닐는지

대봉대를 지나 담장 모퉁이에는 애양단(愛楊檀)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겨울에도 볕이 잘 드는 자리라 해서 애양단이란 이름을 붙였다는데, 확실치는 않은 이야기다. 볕이야 그늘만 아니면 어디나 고르게 뿌려지는 것이니, 이 자리라고 특히 볕이 잘 들 이유도 없다. 또 애양단이란 이름은 훗날 송시열이 이곳을 찾았을 때 붙인 이름이라고 하니, 양산보의 흔적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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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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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대. 정자라 부르기에도 무색한 허름한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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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양단. 애양단은 그냥 담장 밑이어서 그리 눈길을 끌 만한 곳은 못된다.>

 

애양단에서 담장을 따라 길을 꺾으면 바로 오곡문이다. 오곡문(五曲門)은 계류가 통과하는 문으로, 담장 아래를 비워 물길이 지나도록 만들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작은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지금은 문은 없고 오곡문이라는 글만 담장에 새겨져 있다.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이 오곡문으로 들어와 광풍각 아래를 지나 대숲으로 들어가는데, 그 물길이 다섯 번 굽이친다고 해서 오곡문이란 이름이 붙었다.

오곡문을 지나 다시 길을 꺾으면 오른쪽에 초목을 위한 계단식 정원인 화계(花階)가 나온다. 본래 이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해서 매대(梅臺)라 부르는 곳으로, 최근에 다시 매화나무를 심은 곳이다. 이 매대의 뒷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송시열의 글씨로, ‘소쇄원의 처사 양산보의 오두막이란 뜻이다.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던 송시열의 글씨는 유연하면서도 다소곳하다. 송시열 자신이 수없이 벼슬을 마다하며 초야에서 처사로 지내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니, 양산보에게 소쇄처사란 글을 남긴 것은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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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곡문. 담장 밑으로 물이 들어오게 열려 있는 공간이 오곡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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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대의 담에 있는 송시열의 글.> 

 

매대를 지나면 소쇄원의 별서(別墅)인 제월당(霽月堂)이 나온다. 제월당은 언뜻 정자처럼 보이지만 소쇄원의 주인이 거처하는 집으로, 한 켠에 방을 만들어 온돌까지 놓았다. 이런 형태의 별서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든 구조이다. 일종의 소박한 별장인 셈이다.

제월당을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계곡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광풍각(光風閣)이 있다. 제월당이 주인의 거처라면 광풍각은 손님들을 맞는 사랑방 같은 정자다. 이 광풍각이 사방이 트인 곳이어서 바람도 시원하고 또 소쇄원의 풍경을 넉넉히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소쇄원을 찾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꼭 앉았다 가는 곳이 광풍각이다. 광풍각에 앉아 대봉대 쪽 숲을 바라보면 어지러운 듯하면서 차분한 소쇄원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이 제월당과 광풍각이 소쇄원의 중심으로, 그 이름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글귀에서 빌린 것이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말은 옛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인품을 이야기할 때 쓰였던 문구라 한다. 황정견이란 사람이 주돈이의 성품을 일컬어, ‘가슴에 품은 뜻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과 같다고 말한 것에서 가져온 이름이라 한다. 이 글 속에서 제월(霽月)이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하고 광풍(光風)이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을 의미한다. 주돈이는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에 비견되는 대 성리학자였는데, 아마도 빼어나게 맑고 청아한 성품을 지녔던 모양이다. 소쇄원의 주인은 이 주돈이의 성품을 본받고 싶어, 소쇄원의 두 중심 건물에 제월당과 광풍각이란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소쇄원의 이름인 소쇄(瀟灑) 역시 맑고 깨끗하다란 뜻이니 소쇄원의 주인은 마음을 맑고 청결하게 하는 것을 몹시도 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광풍각까지 보았으면 소쇄원을 다 돌아보았다. 이제 대숲 옆 나무다리를 건너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면 된다. 소쇄원에 대한 안내판식 설명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어느 곳이 특히 아름답다거나 어느 곳의 분위기가 빼어나다는 식의 묘사를 보탤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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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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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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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 앞 계곡. 이 물길이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물길이다. 요즘이 수량이 줄어 물이 많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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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과 제월당. 아래 건물이 광풍각이고 계단 위에 있는 건물이 제월당이다. 제월당은 앞에 담을 쌓고 문까지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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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각까지 보았으면 이 나무다리를 건너 다시 대나무숲으로 가게 된다.> 

 

나는 소쇄원을 보고 실망했다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쇄원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예쁜 정원이 아니다. 잘 꾸며진 아기자기한 정원을 생각하고 소쇄원을 찾는다면 열에 아홉은 실망하게 된다. 소쇄원은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이상을 배신하는 세상에 절망한 유학자의 좌절과 절망이 빚어낸 정원이다. 비록 많은 문인들이 그를 흠모해 소쇄원을 찾았지만 그는 끝내 세상을 등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세상에 떨쳤던 그가, 붓을 들어 세상에 남긴 것은 효부(孝賦)’라는 작은 책 한 권뿐이었다.

대신 양산보는 소쇄원에서 대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배롱나무, 복사나무 따위를 가꾸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소쇄원을 남에게 팔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자신이 죽더라도 소쇄원이 세상과 살을 맞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세상에 대한 그의 좌절과 아픔이 얼마나 깊었으면, 죽은 뒤에도 세상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쇄원에서 관광객을 위한 배려나 친절을 찾을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쇄원의 주인이었던 양산보는 이곳에서 멋진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와 세월의 무상함 그리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시선을 고정시키는 단 한 장면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그냥 덧없이 이어지는 시간과 마음의 흐름을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쇄원의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거나 혹은 실망스럽다거나 하는 말은 전혀 무의미하다. 소쇄원에서는 다만 은둔과 단절의 미학을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화의 덕을 그리고 맑고 깨끗한 절제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세속에 물든 마음은 결코 소쇄원의 미덕을 보지 못할지니, 아무리 많은 사람이 소쇄원을 찾아가도, 소쇄원은 여전히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는 정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