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정궁, 경복궁(1)

 

 

서울에는 볼 게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서울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푸념일 뿐입니다. 오히려 서울에는 가 볼만한 곳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저는 볼거리가 많은 것이 서울 사람들의 복이라 생각합니다. 그 많은 볼거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어디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은 자명합니다. 역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서울 명소의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이고 요즘 공무원들이 보고 배워야 할 자연친화적인 도시 환경까지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경복궁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아름다운 여행지인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리고 서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복궁을 찬찬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럼 이제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경복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겠습니다. 조금만 알고 보면 돌아보는 재미가 백 배쯤 커지는 곳이 경복궁입니다.

 

1. 경복궁의 역사 - 창건

 

1392 7,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이 문을 연 것입니다. 이성계가 왕이 되자마자 추진했던 첫 사업은 도읍을 옮기는 천도였습니다. 고려 왕조가 터를 닦고 그 왕조를 이어왔던 개경에 있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이성계는 불도저처럼 천도를 밀어붙였던 것 같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한 달만에 천도를 명하고 신하들을 닦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신들은 개경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지만 이성계의 의지가 워낙 단호했기에 마지못해 천도를 추진했습니다.

이성계는 새 도읍지 자리를 찾아 몸소 터를 보러 다녔습니다. 첫 후보지였던 계룡산 아래 신도안을 직접 돌아보고 궁궐 공사까지 시작했으나 풍수상 좋지 않다 하여 공사를 중단시켰고, 그 뒤 하륜이 건의한 두 번째 후보지인 한양의 무악산 아래(지금의 신촌)를 찾아왔지만 이 역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크게 화를 내고는 스스로 궁궐 터를 정해 버렸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경복궁입니다.

자네들은 입만 열만 불가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짐이 이미 천도하기로 결심했으니 아무도 반대하지 말라.”

천도에 미온적이었던 신하들을 질책했던 이성계의 말입니다. 임금이 이렇게까지 단호히 천도 의사를 밝히는 마당에 더 이상 반대하고 나설 간 큰 신하는 없었습니다. 한양 천도는 이렇게 이성계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경복궁 터는 본래 고려의 남경이 있던 남경터의 남쪽입니다. 고려는 지방에 삼경을 운영했는데, 평양에 서경을 경주에 동경을 그리고 한양에 남경을 두어, 왕이 머물 수 있는 이궁(離宮)을 건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천도를 추진할 당시 한양에 있던 남경은 거의 폐허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터도 좁아 그 남쪽에 새로 궁궐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천도를 결정하고 두 달 뒤인 1394 10월 서둘러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부터 경복궁 창건을 시작해 겨우 열 달만에 경복궁을 완성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성계가 얼마나 천도를 갈망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한양에는 왕이 머물 만한 공간도 없었는데 무작정 천도부터 하고 궁궐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겨울이 시작되는 12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초 스피드로 열 달만에 공사를 끝내 버렸습니다. 천도한 후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 꼭 1년이 걸린 셈인데, 1년 동안 임금인 이성계와 대신들은 비좁은 객사에 머물며 정무를 보았다고 합니다. 개경에 번듯한 궁궐을 놔두고 한양 객사를 임시 궁궐로 쓸 만큼 이성계는 개경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때 이성계와 대신들이 겪었을 불편함과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불편함과 고단함 그리고 대신들의 암묵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천도를 과감하게 단행하고 경복궁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탄생한 것입니다.

당시 경복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 달만에 완성했으니 꼭 필요한 전각만 갖춘 정도였을 것입니다. 경복궁은 그 이후로 태종을 거쳐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정궁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경복궁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갖는 자리에서 정도전은 경복궁(景福)이란 이름을 지어 올렸습니다. 경복(景福)이란 이름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군자만년(君子萬年)은 군자, 즉 임금이 만년을 누리라는 의미이고, 개이경복(介爾景福)은 더불어 큰 복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만수무강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큰 복과 함께 만년을 더불어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경복(景福)은 고사하고 정궁으로서의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광화문 영역

 

(1)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1395년 근정전과 사정전 등 궁의 주요 전각을 건립하고 4년이 지난 1399년에야 궁 주위에 궁성을 두르고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을 세웠습니다. 궁성 공사가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경복궁과 함께 종묘와 사직단을 세우느라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광화문(光化門)이라는 이름은 1426(세종 8)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모든 문과 전각에 이름을 붙일 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전에는 남문 또는 정문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광화문은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답게 다른 궁성의 문보다 훨씬 크고 우아합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 등 이궁의 정문은 규모가 크긴 해도 석축이 없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의 성문은 모두 석축을 쌓고 세 개의 홍예문을 만들어 정궁의 문답게 품격을 높였습니다.

광화문은 그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던 1865(고종 3)에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얼마 후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자 일제는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다시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에 다시 복원했는데 이때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여 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광화문의 위치도 본래 위치와 달랐고, 광화문의 석축을 돌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06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공사가 다시 진행되어 2010 8월에 마침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현재의 광화문을 복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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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지금도 광화문 앞 세종로 주변에 정부기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과거 조선시대에도 광화문 앞에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종로라 부르는 이 거리를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라 불렀는데, 이 거리에 의정부와 육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육조거리에 모여 있던 관청들을 궐외곽사라 불렀는데, 이는 궁 안에 있는 관서인 궐내각사와 구분해서 부른 이름입니다.

광화문 옆에는 해태라 불리는 전설 속의 동물상이 있습니다. 이 해태(해치라고도 함)는 성격이 곧아 잘못이 있거나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들이받거나 물어뜯는 상상 속의 동물로, 정의의 상징이라 합니다. 원래 이 해태상은 육조거리의 사헌부 앞에 있던 것이라 합니다.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과 같은 조선의 최고 수사기관이었습니다. 늘 정의를 지키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사헌부의 관리들에게 해태의 성품을 본받으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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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옆 해치상> 

 

(2) 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바로 흥례문이 나옵니다. 흥례문은 궁성 정문인 광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입니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을 세우던 1395(태조 4)에 세워졌습니다.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1426(세종 8)에 집현전에서 이름을 지었는데, 당시 이름은 흥례문이 아니라 홍례문(弘禮門)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 때 화재로 불 타 없어졌고 1867(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당시 청나라 황제의 이름(弘歷 홍력)()’ 자가 있어 ()’ 자를 피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 흥례문 역시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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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례문> 

 

(3) 영제교(永濟橋)

 

흥례문을 지나면 동서로 가로지르는 물길이 나옵니다. 이 물길이 금천(錦川)입니다. 금천은 이 물길을 경계로 백성들의 세상과 임금의 세상을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금천을 건너는 다리를 보통 금천교(錦川橋)라 하는데 경복궁에서는 금천교라 부르지 않고 영제교(永濟橋)라 합니다. 경복궁의 금천은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근정문 앞으로 끌어들여 만든 인공 수로입니다. 현재는 형태만 복원하고 물길은 복원되지 않아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영제교 옆 금천 축대에는 기괴한 형상의 동물들이 금천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동물 역시 상상 속의 동물로 천록이라는 동물이라 합니다. 몸은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 가운데 뿔이 하나 있는 기괴한 모습니다. 천록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이기도 하고 또 왕의 은혜가 세상을 두루 감쌀 때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원래는 16마리의 천록이 있었다는데 12마리를 없어지고 현재는 4마리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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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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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 천록>  

 

3. 정전(正殿) 영역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을 건너면 궁궐에서 가장 웅장한 정전 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정전(正殿)은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의 사신 영접 또는 법령을 반포하거나 큰 연회를 여는 등 국가적인 큰 행사 때 사용되는 전각으로, 근정전(勤正殿)이 경복궁의 정전입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건물입니다. 근정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이며, 이 정전의 앞마당을 조정(朝廷)이라 부릅니다. 보통 조정 대신이라 부를 때의 조정이 바로 이 조정을 말합니다.

 

(1) 근정문(勤正門)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이 있습니다. 정전 공간은 사방으로 행각을 둘렀는데 남쪽 행각의 가장 큰 문이 근정문입니다. 이 근정문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고 평소에는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근정문 양쪽의 작은 문인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통해 출입했는데, 문반들은 동쪽에 있는 일화문을 무반들은 서쪽에 있는 월화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이 근정문 앞에서 행사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금천을 기준으로 정3품 이상의 고위직은 금천 안쪽에 자리하고 그 이하의 하위직들은 금천 밖에 서서 행사를 치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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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문> 

 

(2) 근정전(勤正殿)

 

근정전은 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큰 전각입니다. 넓은 월대 위에 이층 전각으로 세웠는데 내부는 이층이 아니고 천장이 높은 단층입니다. 경복궁을 처음 세울 때인 1395(태조 4)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소실된 지 272년이 지난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세운 건물로 국보 제223호입니다. 이 건물은 태조 때 세워진 건물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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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야경>  

 

근정전은 넓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이 기단을 월대(月臺)라 부르며 아래쪽을 하월대, 위쪽을 상월대라 합니다. 이렇게 넓고 높은 2층 기단을 놓은 것은 근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월대는 두 층 모두 돌로 난간을 두르고 난간과 난간이 만나는 모서리(이를 문로주 또는 엄지기둥이라 한다)에는 12지신상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돌난간은 팔각으로 다듬었으며, 하엽동자라 불리는 괴임돌이 돌난간을 받치고 있습니다. 하엽동자는 그 모양이 연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찰에서도 난간 받침으로 많이 쓰이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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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근정전 아래 두 단으로 쌓은 돌축대가 월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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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대의 12지신상 중 원숭이>   

 

월대에는 드므와 정이 있습니다. 하월대의 난간 옆에는 방화수통처럼 생긴 무쇠솥이 있는데, 이를 드므라 합니다. 드므는 화재를 방지하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드므에는 물을 채워 놓는데, 불귀신인 화마(火魔)가 찾아왔다가 드므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옛날 궁궐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화재였습니다. 화재를 예방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불이 났을 때 이 드므에 담긴 물이 방화수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상월대의 모서리 부분에는 큰 향로 모양의 정()이 있습니다. 이 정()이 실제 향로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보통 궁에서의 정은 통치자의 상징이라 합니다. 고대 중국의 하나라 때 지방의 아홉 제후들이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각각 정()을 하나씩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정()이 통치자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근정전 상월대에 있는 정() 역시 근정전의 주인인 임금이 통치자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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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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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월대 위에 서 있는 근정전은 정면 5, 측면 5칸의 이층 건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밖에서 보기엔 이층이지만 내부는 위 아래가 트인 단층 구조로 시원하고 넓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정면 끝에 임금의 자리인 사각형의 어좌(御座)가 있고, 어좌 뒤에는 임금의 상징인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일월오봉도라 하기도 한다)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어좌 위에는 화려한 닫집(보개寶蓋라고도 함)을 만들었습니다. 또 근정전의 천장 중앙에는 칠조룡(七爪龍) 두 마리를 그렸습니다. 칠조룡은 발이 일곱인 용으로 황제의 상징입니다. 과거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었으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칠조룡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근정전의 내부는 요즘의 미감으로 보면 너무 단출하고 간결해 보입니다. 그러나 경복궁을 다 돌아보고 나면 조선 왕실이 의외로 화려하지 않고 담백 간결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담백 간결함이 바로 우리 민족의 혼이 아닐까 싶습니다. 간결하고 담백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경복궁의 진정한 멋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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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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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천장의 칠조룡>  

 

(3) 조정과 회랑

 

근정전 앞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합니다. 조정은 얇고 넓은 돌인 박석(薄石)을 깔아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정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인 삼도입니다. 삼도(三道)는 근정문에서 근정전 월대 아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가운데가 양쪽보다 조금 높습니다. 이 가운데 높은 길이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이며, 신하들은 양쪽의 낮은 길로 다녀야 했습니다.

삼도가 끝나는 월대 아래에서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부분을 답도(踏道)라 합니다. 계단은 답도 양쪽에 있습니다. 봉황은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이 계단을 오르면 임금을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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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앞의 넓은 마당이 조정입니다. 그리고 조정 가운데 길이 삼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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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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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계석>   

 

삼도의 양쪽으로 나란히 품계석이 놓여 있습니다. 맨 앞의 정1품부터 마지막 정9품까지 품계가 새겨진 표지석입니다. 근정전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관료들이 자신의 품계에 따라 서야 할 위치를 미리 정해 놓은 표지석입니다. 이때 동쪽에는 무반이 서고 서쪽에는 동반이 섰는데, 이 위치에 따라 문반은 동반, 무반을 서반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이 둘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또 조정의 박석을 잘 살펴보면 바닥의 박석 위에 쇠고리(차일고리라고도 함)가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쇠고리는 근정전 기둥 위 창방에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조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비나 햇볕을 막기 위한 차일을 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쇠고리에 굵은 줄을 묶어 차일(일종의 텐트)을 고정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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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일고리> 

 

회랑(廻廊)은 정전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있는 통로입니다. 이 회랑을 만들어 임금이 비를 피해 움직일 수 있게 하고 또 근정전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본래 태조 때 처음 근정전을 세울 때는 회랑이 아니고 행각(行閣)이었다고 합니다. 행각은 회랑을 막아 방이나 창고처럼 사용했던 공간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이 행각을 창고로 쓰거나 관리들의 사무실로 쓰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이를 회랑으로 고쳤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