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정궁, 경복궁(2)

 

 

4. 편전(便殿) 영역

 

정전 영역을 다 돌아본 뒤에는 편전 영역으로 가게 됩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思政門)을 지나면 바로 편전 영역입니다. 편전(便殿)은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며 국정을 돌보는 곳으로 임금의 집무 공간입니다. 정전은 궁을 대표하는 건물이긴 하지만 큰 행사 때나 쓰였고, 임금의 일상적 집무는 이 편전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침마다 조회를 열고 경연을 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방문객을 맞는 등의 일이 모두 편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경복궁의 편전은 중앙에 중심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을 두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보조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을 두었습니다. 태조 때는 사정전만 있었고 세종 때 만춘전과 천추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사라졌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복원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1) 사정전(思政殿)

 

사정전은 편전 영역의 중심 건물입니다. 태조 때 처음 지었을 때는 보평전(報平殿)이라 불렀는데, 세종 때 보조 편전인 만춘전과 천추전을 지으면서 사정전(思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정전(思政殿)이란 이름은 늘 바른 정치를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정전은 중심 편전답게 좌우의 보조 편전보다 규모가 훨씬 큽니다.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근정전과 같이 전돌을 깔았던 것을 조선 말에 마루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사정전 안의 정면에는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는 임금의 상징인 일월오악도가 있습니다. 또 일월오악도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은은하면서도 힘찬 그림인데 이 그림이 운룡희주(雲龍喜珠)라는 그림으로 구름 속에서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논다는 뜻입니다.

 

사정전(여행편지).jpg

  <사정전>

 

사정전 운룡희주(여행편지).jpg

  <사정전 운룡희주>   

 

(2)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사정전의 보조 편전입니다. 사정전은 중심 편전이긴 하지만 온돌, 즉 난방시설이 없습니다. 대신 만춘전과 천추전에 온돌을 깔아 난방 시설을 해놓고, 추운 계절에는 만춘전이나 천추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습니다.

경복궁에는 동쪽을 봄에 그리고 서쪽을 가을에 비유한 이름이 많습니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이 봄을 의미하고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가을을 의미합니다. 보조 편전 역시 동쪽에 있는 것이 만춘전(萬春殿)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천추전(千秋殿)이니, 봄을 동쪽에 가을을 서쪽에 비유한 이름입니다.

이 두 건물은 세종 때 처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다시 지금의 형태로 세워졌습니다. 그후 만춘전은 6.25 전쟁 때 폭탄을 맞아 소실되었던 것을 1988년에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두 건물은 똑 같은 형태로 세워졌는데 임금의 집무실이라기엔 너무 단출해 보일 정도로 소박합니다.

 

만춘전(여행편지).jpg

  <만춘전> 

 

(3) 천자고(天字庫)

 

편전 영역의 정면, 즉 사정문 옆으로는 행각(行閣)이 이어집니다. 행각의 이름이 서쪽부터 천자문의 순서인 천(), (), (), ()…을 따라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순서를 나열한 것뿐입니다. 요즘은 순서를 나열할 때 아라비아 숫자를 쓰거나 가, , 다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과거에는 천자문의 순서대로 순서를 정했습니다. 서울 성곽에도 순서대로 구획을 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천자문의 순서대로 구획을 정했습니다.

이 행각은 창고로 쓰이던 곳이라 합니다. 도서관으로 쓰였다는 말도 있고, 활자를 보관하던 곳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집무 공간 바로 앞에 있는 행각이니, 아마도 임금에게 자주 소용되는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했을 것입니다.

 

천자고(여행편지).jpg

  <천자고> 

 

5. 경복궁의 역사 - 1차 왕자의 난과 개경 환도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지만 실제로는 정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역대 임금이 경복궁에 머문 기간은 반도 되지 않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경복궁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하는데, 이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경복궁에서는 크고 작은 화재도 잦았고 또 좋지 않을 일들도 많이 벌어졌습니다.

 

경복궁에서 벌어진 첫 비극은 제1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태조가 경복궁을 세운 지 꼭 3년째 되던 해인 1398 8,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태자였던 방석은 경복궁 서문 밖에서 죽었고, 방번은 한강변 양화진에서 죽었다고 한다. 늙은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이 어린 동생들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크게 상심한 태조는 둘째아들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2대 정종으로 즉위한 방과는 즉위 1년 뒤인 1399년 수도를 옛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으로 옮겼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단행한 지 5년만에 한양을 버리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경복궁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 환도의 이유였습니다.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이방원도 환도에 찬성했다고 하는데, 아마 환도의 진짜 이유는 동생들을 죽인 경복궁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개경 환도 이듬해인 1400년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으로 즉위했습니다. 물론 한양이 아닌 개경에서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1404 9(태종 5)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게 되는데, 태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습니다. 태종은 창덕궁을 새로 지어 한양으로 돌아와 경복궁을 외면하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인 경복궁이 끝내 싫었을 것입니다. 그후 세종이 즉위하면서 경복궁으로 들어가 경복궁은 다시 정궁으로의 역할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1419년까지, 경복궁은 무려 20년간 주인 없는 궁궐로 지내야 했습니다. 창건된 후 4년간만 궁의 역할을 하고 그 이후 20년이나 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 경복궁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경복궁을 싫어했지만 경복궁을 방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면 경복궁에서 연회를 열곤 했는데, 이 연회를 위해 1412(태종 12)에 경회루를 크게 고쳐 지금의 웅장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경회루는 작은 연못이었다고 합니다.

 

6. 궐내각사 영역과 경회루

 

편전 영역 뒤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소이자 사적인 생활 공간인 침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전으로 가기 전에 먼저 경회루와 경복궁의 서쪽 영역인 궐내각사 영역을 돌아보겠습니다. 실제로 경복궁을 돌아볼 때 편전을 본 뒤에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경회루 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편전 영역의 서쪽, 그러니까 천자고 바로 옆 작은 문을 지나면 궐내각사 영역과 경회루가 나옵니다.

 

(1) 궐내각사(闕內各司)

 

서쪽 영역으로 나가면 왼쪽으로 수정전 건물 하나만 달랑 서 있고, 수정전 너머 멀리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보입니다. 이렇게 텅 빈 공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많은 전각들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가 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 즉 궐내각사 자리입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서를 궐외곽사라 부르고 궐 안에 있던 관서들을 궐내각사라 불렀는데, 궐내각사에는 왕의 지척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관서와 궁궐을 호위하는 관서 그리고 궁궐을 유지 관리하는 데 필요한 관서, 그리고 천문 관측 등 과학을 담당하던 관서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부속실쯤 되는 부서들인데, 요즘보다는 훨씬 많은 관서들이 있었습니다.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관서는 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 역할을 했던 홍문관, 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담당하던 춘추관, 옥새와 마채 등을 관리하던 상서원 등이 있었습니다. 또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던 오위도총부, 금군삼청 등이 있었고, 왕실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관서로는, 의복을 담당하던 상의원, 의약을 담당하던 내의원, 궁인들을 관리하던 내반원, 궁 안의 식사를 관리하던 사옹원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정전 주위로 빼곡히 관청이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많던 궐내각사의 관청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 하나만 남고 모두 없어졌습니다.

 

(2) 수정전(修政殿)과 영추문(迎秋門)

 

수정전(修政殿)은 궐내각사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입니다.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쓰였고,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사정전에서 아주 가까운 전각이니, 아마 임금이 중히 여겼던 부서가 이 건물을 썼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한 뒤로는 침소나 편전 역할을 하기도 했고, 1894년 갑오경장 때는 군국기무처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다양하게 쓰였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시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였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이 건물에서 우리의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수정전 역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고 고종 때 새로 중건했습니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문으로,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주로 이용하던 문입니다. 현재의 영추문은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에 석축 대신 콘크리트로 복원을 해 놓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석축으로 바로잡아야 할 문입니다.

 

수정전(여행편지).jpg

  <수정전> 

 

(3) 경회루(慶會樓)

 

궐내각사 영역의 북쪽에 크고 웅장한 경회루가 있습니다. 경회루(慶會樓)는 사각형의 넓은 연못에 들어선 거대한 이층누각입니다. 이런 연못을 보통 방지(方池)라 부르는데 이 연못의 고유명사는 아니고, 사각형의 연못이라는 뜻입니다. 연못 가운데는 둥근 섬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는데, 방형(사각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을 만든 전형적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 연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 형태로 방형의 연못은 땅을 그리고 원형의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하늘은 방형이고 땅은 원형이라는 옛 사상이 반영된 형태이며, 또 하늘은 양을 땅은 음을 상징해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라 합니다.

 

이 방지의 동쪽 귀퉁이에 경회루가 있습니다. 경회루(慶會樓)경사스러운 만남이라는 이름 그대로 연회장으로 쓰이던 누각입니다.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나 조정 대신들과의 연회가 이곳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습니다. 경복궁이 처음 창건될 때는 작은 연못에 지나지 않았는데, 태종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위해 지금처럼 연못을 넓히고 웅장한 경회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종 때는 돌기둥에 용을 새겨 물에 비친 용 조각이 우아했다고 하는데, 고종 때 복원하면서 지금처럼 사각형의 기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누각을 올렸습니다. 석축으로 섬을 만들고 그 위에 경회루를 세운 것입니다. 석축 둘레에는 돌난간을 두르고 모서리 난간(문로주, 엄지기둥이라고도 함)에는 해태와 불가사리 등 상상의 동물들과 12지신상을 조각해 올려놓았습니다. 경회루의 1층은 높은 주춧돌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마루를 깔아 연회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경회루는 세 개의 석교로 연못 외부와 연결되는데, 맨앞(남쪽)에 있는 다리가 나머지 두 개의 다리보다 넓습니다. 이 넓은 다리의 가운데에 어도를 두어 임금이 다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경회루와 방지는 조선에서 가장 큰 누각이자 인공연못이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 이토록 웅장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경회루04(여행편지).jpg

  <경회루>  

 

7. 내전(內殿) 영역

 

경회루를 본 다음에는 내전으로 가게 됩니다. 편전으로 다시 들어가 사정전 뒤의 향오문을 지나면 내전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내전은 왕과 왕비의 침소가 있는 곳으로 왕과 왕비의 사적인 생활 공간입니다.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내전 영역에 해당됩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특이하게 용마루가 없습니다. 용마루는 지붕 한가운데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로 원래 조금 높게 처리합니다. 그런데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 용마루를 없애 지붕 한가운데가 좀 꺼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강녕전과 교태전, 즉 왕과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를 올리지 않은 까닭은 정확치 않습니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침전은 지상의 용인 왕이 머무는 곳이자 또 다른 용인 왕자를 잉태하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기운을 가로막는 용마루를 없앴다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1) 강녕전(康寧殿)

 

향오문을 지나면 바로 강녕전이 나옵니다. 강녕전(康寧殿)은 대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임금의 침소로 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공간입니다. 이 강녕전 영역에는 가장 큰 건물인 강녕전이 있고 강녕전 주위로 네 채의 작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모두 다 왕의 침전으로 가장 큰 강녕전을 대침(大寢)이라 부르고 작은 침전들을 소침(小寢)이라 부릅니다.

강녕전은 임금의 침소답게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건물 앞에 넓은 월대를 만들고 행각으로 강녕전을 둘렀습니다. 강녕전은 태조가 처음 경복궁을 창건할 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했고, 고종 때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녕전 건물을 헐어 창덕궁 복원에 사용하면서 다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후 1965년 경복궁의 1차 복원 때 지은 건물이 현재의 강녕전입니다.

 

강녕전1(여행편지).jpg

  <강녕전> 

 

(2) 교태전(交泰殿)

 

강녕전 뒤의 양의문(兩儀門)을 지나면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交泰殿)이 나옵니다. 이 왕비의 처소가 궁궐에서 가장 깊숙하게 감춰진 곳이라 하여 이를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왕비는 궁궐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아 주로 이 교태전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왕비를 위해 교태전 영역은 경복궁에서 가장 세심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담장에도 곱게 꽃 문양을 넣어 꾸몄고, 문살도 다른 전각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형태입니다.

교태전은 태조 때는 없었다고 합니다. 1330(세종 22)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때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철거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교태전 역시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철거했고, 지금의 교태전은 1996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교태전1-1(여행편지).jpg

  <교태전> 

 

교태전 뒤쪽에는 아미산이라 불리는 화단이 있습니다. 이 공간이 오직 왕비만을 위한 후원입니다. 아미산은 크게 석축으로 층을 쌓고 층층이 나무를 심고 석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런 석축을 화계(花階)라 하는데 우리나라 궁과 사대부가의 전통 정원 방식입니다. 경회루의 방지를 조성하며 거기에서 나온 흙으로 아미산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경회루를 만든 시기가 교태전을 만든 시기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기 때문에 믿기는 어렵습니다. 아미산은 중국에 있는 아름다운 산의 이름인데, 이 산의 이름을 따서 교태전의 후원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 아미산을 본 사람은 너무 단순해서 과연 왕비의 후원이 이 정도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미산 화계에 솟아 있는 굴뚝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미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아미산 굴뚝은 우리나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으로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굴뚝은 모두 네 개로 전부 육각기둥 형태이며, 기둥의 각 면에 십장생과 봉황, 귀면, 당초문양 등의 무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느끼게 되는 것 역시 궁의 소박함입니다. 아미산 굴뚝이 세심하게 공을 들이긴 했어도 조선 국모의 후원이라기엔 너무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미산03(여행편지).jpg

  <아미산>

 

아미산 굴뚝1(여행편지).jpg

  <아미산 굴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