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정궁, 경복궁(3)

 

 

8. 경복궁의 역사 - 임진왜란과 경복궁 중건

 

경복궁은 창건 이후 계속 크고 작은 화재에 시달렸습니다. 가장 컸던 화재는 1553(명종 8)에 일어났습니다.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 대부분이 소실된 큰 화재였다고 합니다. 1543(중종 38)에 동궁에 불이 났었는데, 10년만에 동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더 큰 화재가 났다고 합니다. 결국 왕실은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다음해 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돼 그해 가을에 복원을 끝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복궁 최대의 비극은 그로부터 40년 뒤인 1592(선조 25)에 일어났습니다. 1592년 봄,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인 임진왜란 터진 것입니다. 4 13일 부산으로 들어온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했습니다. 보름 뒤인 4 28, 왜군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신립의 저지선을 격파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하자, 선조는 몽진을 결정했습니다. 탄금대 전투 이틀 뒤인 4 30, 선조는 야심한 밤을 이용해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틀 뒤인 5 2일 왜군이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충주에서 겨우 4일만에 한양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대군의 행군 속도라곤 믿기 어려운 빠른 속도였습니다.

임금이 야반도주하듯 한양을 떠난 것에 이미 큰 충격에 휩싸여 있던 백성들은, 왜군이 한양으로 들어오자 텅 빈 경복궁에 난입해 불을 질렀습니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임금과 조정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습니다. 그렇게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터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1395년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은 200년도 채 되지 않아 백성들의 손에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은 경복궁 복원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궁이 폐허가 되어 전쟁이 끝난 뒤에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경운궁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복원했고, 그 이후로 창덕궁을 보수해 조선의 임금들은 계속 창덕궁에서 지내며 정무를 보았습니다.

 

경복궁 복원은 그로부터 273년이 지난 1865(고종 2)이 되어서야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273년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불에 탄 채 잿더미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경복궁 중건을 이루어낸 사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사업을 벌였습니다. 중건 도중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몇 번 있었고 무리한 공사로 인한 폐해가 속출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경북궁 중건을 밀어부쳤습니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한 지 3년만인 1868(고종 5) 6, 마침내 대역사였던 경복궁 중건을 완공했습니다.

 

9. 자경전과 동궁 영역

 

(1) 자경전(慈慶殿)

 

아미산에서 중앙 통로 쪽 작은 문을 나서면 북동쪽으로 예쁜 담장이 보입니다. 이 담장 너머가 자경전입니다.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정왕후를 위한 거처로 세운 전각입니다.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깊은 인물입니다. 신정왕후는 익종의 비로 신정왕후라는 이름보다 조대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익종은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임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뒷날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으로 추존되어 종묘에 배향되었습니다. 헌종의 뒤를 이어 철종마저 젊은 나이에 죽자,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에 앉혔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고종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조대비가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대비를 위한 공간인 자경전을 따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웠던 자경전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888년에 새로 중건한 건물입니다. 자경전은 가운데가 툭 튀어나온 독특한 형태의 건물로, 가운데 돌출부를 청연루라 하는데 이는 건물에 딸린 누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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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자경전 역시 대비의 거처이므로,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여성적인 우아함이 돋보이는 곳입니다. 우선 담장부터가 다른 전각들과는 다릅니다. 담장 중간중간에 예쁜 꽃 문양이 들어 있어 이 담을 자경전 꽃담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자경전의 백미는 역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된 십장생굴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경전 뒤쪽으로 가면 굴뚝을 한 곳으로 모아 담장처럼 만들었는데, 이 굴뚝 담장에 십장생 무늬가 들어 있어 십장생굴뚝이라 부릅니다. 아마도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벽돌에 각각 십장생 무늬를 넣고 구워낸 것으로 세심하게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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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꽃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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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십장생굴뚝>  

 

(2) 동궁(東宮)

 

자경전의 남쪽이자 편전의 동쪽에 세자의 거처인 동궁 영역이 있습니다. 세자는 다음 세대의 임금이므로 뜨는 해와 같다 하여 동쪽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세자의 거처를 동궁(東宮)이라 불렀습니다. 동궁 일원은 일제시대에 모두 철거되었다가 1999년에 이르러야 복원되었습니다. 현재 동궁에는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자선당은 세자가 거처하던 공간으로 임금의 침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비현각은 공부도 하고 정무도 보던 임금의 편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동궁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합니다. 고종 때 제작된 경복궁 시설도인 북궐도(北闕圖)를 보더라도 동궁에 다른 전각들이 많습니다. 세자가 백관에게 조회를 받던 계조당, 세자가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머물던 계방 등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음식을 만들던 소주방과 세자와 세자빈의 시중을 들던 궁녀들이 거처하던 공간까지 모두 동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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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궁전 비현각> 

 

10. 향원정 영역

 

자경전에서 북쪽으로 작은 문을 통과해 담장을 지나면 아늑한 숲길이 나옵니다. 이 길이 향원지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원래 이 길의 동쪽으로는 후궁 영역이었다고 합니다. 임금의 후궁들이나 궁녀들이 거처하고 또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북궐도에는 이 공간에도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제수함 한 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 이 길의 서쪽으로는 궐내각사 건물들이 일부 들어서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철거되고 지금은 아늑한 숲길이 되어 있습니다. 이 숲의 분위기가 아주 곱고 아늑한데, 특히 가을이면 빼어난 운치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이 길을 지나면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향원지가 나옵니다.

 

(1) 향원정(香遠亭)

 

향원정(香遠亭)은 향원지 연못 한가운데 있는 둥근 섬 위에 세워진 정자입니다. 향원지의 형태는 경회루가 있는 방지의 형태와 같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입니다. 방지(方池), 즉 사각형의 연못은 하늘을 상징하고 원도(圓島), 즉 둥근 섬은 땅을 상징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 형태입니다. 향원지는 방지보다 규모가 작고, 연못 가장자리를 자연석으로 쌓아 더 부드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향원지가 방지보다 훨씬 아늑해 보이는 것은 역시 향원정이라는 정자 때문입니다. 경회루는 웅장하고 남성적이지만 이 향원정은 우아하고 여성적입니다. 이런 까닭에 향원지가 방지보다 훨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향원정은 이층 육각정자로 멀리서 보기에도 균형미가 완벽한 아름다운 정자입니다. 게다가 주변의 소나무들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향원정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또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취향교(醉香橋) 역시 여성적인 나무 다리로, 수줍은 듯 살짝 아치를 이루는 홍예교입니다. 이 취향교와 어우러진 향원정의 풍경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선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향원정(香遠亭)이란 이름이 향기가 멀리까지 퍼진다는 의미이고, 취향교(醉香橋)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이니 이름에서도 운치가 가득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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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원정> 

 

원래 향원정이 있던 자리는 취로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라 합니다. 세조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고 취로정이란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후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한 다음 고종이 건청궁을 새로 지으면서 향원지와 향원정을 만들었습니다. 건청궁이 향원정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취향교가 향원정의 북쪽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일제 강점기 때 건청궁이 철거되고 또 6.25 전쟁 때 취향교마저 파괴된 뒤, 향원정 일대를 복구하면서 취향교를 남쪽으로 놓아 지금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건청궁을 복원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굳이 다리를 북쪽으로 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향원지로 들어오는 물은 향원지 북서쪽에 있는 열상진원에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열상진원(冽上眞源)에서 나온 물은 직접 향원지로 흘러들게 하지 않고, 석조물 가운데로 물길을 만들어 두 번을 직각으로 꺾이게 한 후에 향원지로 흘러듭니다. 이는 이 샘의 물이 워낙 차서 물의 온도를 좀 높이고 또 물의 흐름이 연못에 비친 풍경을 흔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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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원정 열상진원> 

 

향원정 구역은 경복궁에서 가장 아늑하고 또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언제 찾아도 그 아늑한 아름다움에 폭 빠져들게 되는 곳입니다.

 

(2) 건청궁(乾淸宮)

 

향원지 북쪽에는 단청을 입히지 않은 새 전각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건청궁입니다.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직접 세운 전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주로 머물던 곳입니다. 고종은 즉위 10년만에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폐지하고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물론 조정 대신들도 모르게 고종이 세운 건물이 건청궁입니다. 그 뒤 건청궁 공사가 알려지게 되자 조정 대신들이 공사를 반대했지만 고종은 끝내 이 건청궁을 완공하여 명성황후가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건청궁은 조선 말 최대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1895,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일본 낭인들이 이곳 건청궁까지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그 뒷산에서 시신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곳이 바로 건천궁입니다.

그리고 이 건청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를 사용했던 건물이기도 합니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자사의 전구를 홍보하기 위해 동양 최초로 이곳에서 전구로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건청궁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해 놓았습니다.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지만, 아픈 역사가 떠올라 오래도록 눈길을 주기 힘든 곳이 바로 이 건청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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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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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청궁 옥호루. 이 건물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습니다.>  

 

(3) 집옥재(集玉齋)

 

건청궁의 서쪽으로 집옥재가 있습니다. 집옥재(集玉齋)옥을 모아 놓은 집이라는 의미처럼 고종이 서고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책을 옥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집옥재는 한눈에 보기에도 중국풍의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종이 중국의 건축 기술자를 불러다가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집옥재는 동쪽의 협길당(協吉堂) 그리고 서쪽의 팔우정(八隅亭)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팔우정과 협길당이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건물인데 비해 가운데 집옥재가 중국풍의 건물이어서 왠지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이 집옥재는 본래 창덕궁에 있던 건물이라 합니다. 고종이 창덕궁에 집옥재와 협길당, 팔우정을 세웠는데 1888년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또 집옥재의 현판 글씨는 송나라의 명필로 알려진 미불 주원장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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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옥재>

 

(4) 태원전

 

태원전(泰元殿)은 경복궁의 맨 뒤쪽 끝에 있는 건물로,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빈전(殯殿)이란 왕실 사람이 궁에서 죽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며, 혼전(魂殿)이란 시신을 산릉에 매장한 후 장례 기간 동안 신주를 모시는 곳입니다. 태원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세워진 건물로, 처음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시신을 이곳에 보관해 빈전이 되었고, 그 이후로 국상이 있을 때면 빈전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정문에서 태원전까지는 중앙 회랑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중앙 회랑을 복도각이라 합니다. 이 복도각이 빈전이나 혼전의 특징이라 합니다.

태원전은 2006년 복원되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과거에 청와대를 경비하던 부대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신군부 세력이 이곳에서 군사 쿠데타를 모의하여 12.12 사태를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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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전> 

 

 

11. 경복궁의 역사 - 일제 강점기의 경복궁

 

경복궁은 창건된 지 꼭 500년이 되던 1895 10, 씻을 수 없는 오욕이자 경복궁의 마지막 비극을 맞게 됩니다.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벌어진 것입니다. 을미사변이 터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갔는데, 이 일이 아관파천입니다. 결국 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궁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왕이 경복궁에 머무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1395년 태조 때 첫 완공을 본 이후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경복궁은 꼭 500년만에 궁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했습니다.

 

1910년 조선병합에 성공한 일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제는 그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노골적인 경복궁의 첫 훼손은 1915년에 벌어졌습니다. 일제는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하여 시정오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습니다. 지난 5년간 발전된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도로 개최된 일종의 산업 박람회인데, 일제는 이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 것입니다. 조선 왕조보다 일제의 통치가 훨씬 조선에 유익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홍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 일제는 이 행사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이 좁다는 이유로 동궁전 등 전각 일부를 철거해 버렸으며, 전국 각지에 있던 탑 등의 문화재를 경복궁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두 번째 경복궁 파괴는 1917년에 벌어졌다.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해 여러 전각들이 불에 타자, 일제는 창덕궁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그 목재를 창덕궁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때 철거된 전각들이 강녕전, 교태전을 비롯하여 무려 400여 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 경복궁에는 근정전과 경회루 등 몇 동의 전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복궁 파괴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경복궁의 흥례문과 광화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당시 경복궁의 후원이 있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관저를 지었습니다. 특히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을 상징하는 자 형태의 건물로 세웠습니다. 이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 8 15일을 기해 철거되고, 그후로 경복궁의 복원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경복궁 탐방을 마칩니다. 경복궁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에 관심을 가지고 경복궁을 찾아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