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세운 별궁, 경희궁

 

 

1. 경희궁의 역사

 

경희궁(慶熙宮)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이어 네 번째로 조성된 조선의 이궁입니다. 1617(광해군 9)에 공사를 시작해 1620(광해군 12)에 완공했습니다. 처음 지었을 때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는데 1760(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을 당시 경희궁 자리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풍수상의 말을 듣고, 광해군은 동생의 집을 빼앗아 경희궁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경희궁을 완공한 3년 뒤인 1623,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즉위하면서 광해군이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집을 빼앗겼어도 집터의 왕기가 인조를 왕으로 만든 모양입니다. 인조는 광해군에게 아버지의 집을 빼앗기고 동생인 능창군마저 역모죄로 처형 당해,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광해군은 경희궁 외에도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궁궐 건축을 계속했는데, 인조반정으로 폐위됨으로써 이 궁궐들은 완공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후 경희궁은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西闕)이라 불렸습니다. 동궐(東闕)은 동쪽에 있던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해 부르던 이름이었으니, 경복궁의 동쪽과 서쪽에 이궁이 있었던 셈입니다. 경희궁은 당시 100여 동의 건물이 있던 궁궐로 역대 조선 왕들의 별궁 역할을 했으며, 영조가 특히 경희궁을 좋아해 경희궁에 오래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후 1829(순조 29)에 큰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탔으나, 곧 복구를 시작해 1831년에 중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을 경복궁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총독부는 경희궁에 경성중학교를 세운다는 구실로 경희궁을 완전히 철거해 버렸습니다. 이때 일본인들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동국대학교로 옮기고 흥정당은 광운사로, 또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마음대로 옮겨 버렸습니다.

해방 후에도 경희궁의 사정의 그대로였습니다. 경성중학교가 서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오랫동안 경희궁 터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서, 경희궁의 완전한 복원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후 1988년부터 경희궁의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해 일부 전각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나 형태를 볼 때 다른 궁에 비해 고궁의 의미는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2. 경희궁의 전각들

 

(1) 흥화문(興化門)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단층 문입니다. 원래 있던 자리는 이 자리가 아니고 서울역사박물관 앞 구세군빌딩 자리에 동향으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흥화문은 아픈 역사를 간직한 문입니다. 일제시대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자 일본인들은,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웠는데, 이때 이 흥화문을 옮겨가 박문사의 정문으로 쓴 것입니다. 결국 흥화문은 한동안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사당의 정문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해방 후 박문사가 없어진 후에 그 자리에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섰고 흥화문은 계속 신라호텔의 정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흥화문-1(여행편지).jpg

  <흥화문>  

 

(2) 금천교(禁川橋)

 

궁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금천(또는 명당수라 부르기도 한다)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는 임금을 대하는 신하들이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도 있고 또 임금의 세상과 백성의 세상을 구분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경희궁의 금천교도 복원이 되었는데, 자리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뒤에 있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복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흥화문이 옛 자리를 찾지 못하고 금천교만 옛 자리에 복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금천교-1(여행편지).jpg

  <금천교> 

 

(3) 숭정문(崇政門)

 

숭정문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입니다. 1988년부터 경희궁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새로 지은 문루입니다.

 

숭정문1-1(여행편지).jpg

  <숭정문> 

 

(4) 숭정전(崇政殿)

 

숭정문을 지나면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이 나옵니다. 정전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던 건물로 정전 앞마당을 조정이라 합니다. 이 숭정전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의 즉위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조정의 품계석과 어도, 삼도 등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 숭정전 역시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입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가 숭정전 건물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결국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란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이 원래 숭정전을 옮기려 했으나 워낙 절차가 복잡해 포기하고, 현재 경희궁에 있는 숭정전은 새로 지은 것이라 합니다. 본래의 숭정전은 아직도 동국대학교에 있습니다. 복원된 숭정전 내부에는 어좌와 일월오봉도 그리고 천장의 용 두 마리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숭정전-1(여행편지).jpg

  <숭정전> 

 

(5) 자정전(資政殿)

 

숭정전 뒤에 위치한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건물입니다. 그러나 경희궁에서 업무를 보던 임금은 그리 많지 않아, 자정전은 여러 용도로 쓰였던 것 같습니다. 숙종이 승하했을 때는 숙종의 빈전으로 쓰였고, 그 뒤에는 선왕들의 위패를 보관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자정전(여행편지).jpg

  <자정전> 

 

(6) 태령전(泰寧殿)

 

자정전 서쪽으로 태령전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용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744(영조 20)에 영조는 이 건물을 고쳐 짓고 자신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왕조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승하한 선왕의 영정을 모신 건물은 있어도, 현왕의 어진을 모신 전각은 이 태령전이 유일했던 것 같습니다.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태령전(여행편지).jpg

  <태령전> 

 

(7) 서암(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바위입니다. 예부터 이 바위가 상서로운 바위로 알려져 왕암(王巖)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바위 탓에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바위 바로 아래에는 샘이 있어 이 샘을 암천(巖泉)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바위에 샘이 흐르는 물길을 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숙종이 직접 이 바위를 보고 상서로울 서()’ 자를 써서 서암이라 이름 짓고, 직접 서암이란 글을 써서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숙종이 세웠던 비석은 현재 없고, 서암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서암(여행편지).jpg

  <서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