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한제국의 궁, 덕수궁(경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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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중화전> 

 

1.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의 이궁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해 갑자기 만들어진 궁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백성들에 의해 모두 불타 버려 기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전 월산대군의 집을 중심으로 주변 민가 여러 채를 합해 임시 행궁으로 삼아 머물렀는데, 이 자리가 지금의 덕수궁입니다.

당시에는 덕수궁을 시어소(時御所)’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정릉동 행궁이란 말은 과거 이 자리에 태조의 비인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조는 창덕궁의 복구를 서둘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이곳 정릉동 행궁에서 죽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1611(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가 끝나자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왕이 머물렀던 곳이니 궁이 된 것입니다. 선조와 광해군이 경운궁에 머문 기간은 약 7년 정도입니다.

그뒤 광해군은 다시 경운궁으로 이어해 잠시 머물다가 창덕궁으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경운궁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머무는 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18(광해군 10),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시키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춰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는 이곳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와 즉위식을 갖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후 인조는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건물만을 남기고 경운궁의 나머지 땅과 집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으로 인해 궁이 되었던 경운궁은 일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경운궁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1895(고종 32),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경복궁으로 돌아갈 뜻이 없어, 경운궁을 다시 궁으로 복구한 후 1897 2,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고종은 그해 10월 경운궁에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경운궁에 중화전, 함녕전, 선원전 등의 전각을 새로 지어, 경운궁이 황제의 궁궐로서 작게나마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04년 큰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어 이를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지자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순종은 고종을 경운궁에 남겨둔 채 창덕궁으로 이어했습니다. 이때 순종은, 고종이 머무는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습니다. 부황제인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그후 고종은 덕수궁에서 12년을 더 산 뒤 1919년 덕수궁에서 승하했고, 이로서 덕수궁도 궁으로서의 역할을 마쳤습니다.

해방 후에 한국 정부는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꾸며 스케이트장과 음식점 등이 들어섰다가 다시 복원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 덕수궁의 전각들

 

(1) 대한문(大漢門)

 

대한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입니다. 그러나 본래 덕수궁의 정문은 중화전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고, 대한문은 덕수궁의 동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도로 개설을 구실로 인화문을 헐어버려서, 동문인 대한문이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 궁궐의 정문 이름에 모두 들어가는 ()’ 자도 없고, 다른 궁의 정문이 2층인데 비해 규모도 단출한 단층입니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고 하는데,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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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 

 

(2) 중화문(中和門)

 

대한문으로 들어서서 곧장 걸으면 중화문이 나옵니다. 중화문(보물 제819)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입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중화전을 세울 때인 1900년대 초에 처음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2층 문루였다고 하는데 1904년 대화재 때 불타 없어지고 그 뒤에 복구하면서 지금의 단층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본래는 중화문의 좌우에 행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헐리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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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문> 

 

(3) 중화전(中和殿)

 

경운궁은 원래 임진왜란으로 인해 잠시 사용되던 행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따로 정전을 세우진 않았고, 당시에는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97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후, 경운궁의 격을 높이기 위해 당당한 2층 건물의 정전을 세웠는데 이 정전 건물이 중화전입니다. 그러나 1902년 완공된 중화전(보물 제819)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906년에 지금의 단층 건물로 다시 세웠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들이 2층 건물인데 비해 중화전은 단층인데다가 행랑마저 없어 좀 초라해 보입니다. 황제의 정전인 중화전을 단층으로 복구한 것은 당시 대한제국의 국고가 넉넉치 못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마당 조정에 품계석과 어도, 답도 등이 남아 있고, 내부에도 어좌, 일월오봉도, 보개 등이 설치되어 있고, 천장에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용이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인데 비해, 중화전의 용은 발톱이 5개인 오조룡입니다. 또 다른 궁의 정전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지만 이곳 중화전 답도에는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중화전이 황제의 정전이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용은 황제를 상징하고 봉황은 왕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또 중화전은 다른 궁과는 달리 창살을 황금색으로 칠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황금색이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궁은 왕을 위한 궁이어서 황금색을 쓰지 못했는데, 덕수궁은 대한제국 황제의 궁으로 세워져서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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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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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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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 천장 용>   

 

(4) 광명문(光明門)

 

중화문의 맞은편 비스듬한 곳에 광명문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문이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문입니다. 이 광명문은 원래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정문으로, 함녕전 남쪽에 있던 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1938년 일본인들이 석조전을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현재는 광명문에 흥천사 범종과 자격루, 신기전 등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흥천사는 태조가 도성 안에 세운 큰 절로,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의 원찰이었다고 합니다. 정릉은 원래 이 덕수궁 자리에 있었는데, 태종 이방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시켰습니다. 흥천사는 그 이후에도 이 자리에 남아 있었는데, 1504(연산군 10)에 화재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중종 때 절터를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어 이곳에 대신들의 집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 흥천사에 있던 종이 바로 광명문에 걸린 종으로 보물 제1460호입니다. 자격루는 세종 때 장영실이 개발한 물시계로 광명문에 있는 자격루는 중종 때 만든 것이라 합니다.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자격루는 아니라고 합니다. 신기전은 다연발 화살 발사기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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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문> 

 

(5) 함녕전(咸寧殿)

 

함녕전(보물 제820)은 고종의 침전으로, 덕수궁의 내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1897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처음 지었으나, 1904년 화재 때 불에 탄 것을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습니다. 고종은 아들 순종이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1919 1 22일 이 함녕전에서 승하했습니다.

함녕전은 가운데를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 양쪽에 침실을 두었습니다. 동쪽이 고종의 침실이었고 서쪽은 황비의 침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명성황후는 숨을 거둔 뒤여서 이 서쪽 황비의 침실은 비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듯 덕수궁은 왕과 왕비의 침소를 따로 만들지 않고 함녕전에 함께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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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녕전> 

 

(6) 덕홍전(德弘殿)

 

덕홍전은 덕수궁의 편전으로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덕홍전은 1911년에 세운 건물로 이때는 이미 한일합방이 체결된 이후였습니다. 그러므로 고종이나 순종 모두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편전이라 부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 매일신문의 덕홍전 준공 기사를 보면 덕홍전을 알현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 창덕궁의 인정전 역시 이왕전하의 알현실이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편전이 손님을 맞는 방 정도로 쓰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망국의 왕이 겪어야 했던 치욕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덕홍전은 정면 3, 측면 4칸인 건물로 특이하게도 정면의 기둥보다 측면의 기둥이 많은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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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홍전> 

 

(7) 즉조당(卽祚堂)과 준명당(浚明堂)

 

중화전 뒤에는 즉조당과 준명당이 있습니다. 두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조당은 고종이 중화전을 짓기 전까지 경운궁의 정전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집무실로 썼고, 그뒤 광해군과 인조가 이 즉조당에서 즉위했습니다. 그후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들어와 편전, 즉 집무실로 썼습니다. 그뒤 순종이 이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비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언제 처음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1904년 덕수궁 화재 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해에 다시 지었습니다.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준명당은 고종이 덕수궁을 증축할 때인 1897년에 세운 건물로, 고종이 접견실로 사용했다고 하니, 잠시 동안 편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보입니다. 이 준명당 역시 1904년 화재로 불타 그해 즉조당과 함께 새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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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과 준명당> 

 

(8) 석어당(昔御堂)

 

본래 덕수궁의 내전으로 쓰였던 건물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덕수궁을 임시 궁으로 사용할 때, 석어당을 내전으로 즉조당을 외전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조는 창덕궁이 복구되기 전에 이곳 석어당에서 승하했습니다. 그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경운궁(덕수궁)에 유폐시켰을 때 인목대비가 거처하던 건물도 이 석어당이었다고 합니다. 언제 처음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덕수궁 자리의 원래 주인이었던 월산대군의 자손이 머물 때부터 있었던 건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덕수궁 내 유일한 이층 목조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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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어당> 

 

(9) 석조전(石造殿)

 

덕수궁 내에 있는 유럽식 석조 건물로, 1900년에 공사를 시작해 10년만인 1910년에 완공한 건물로, 영국인들이 설계와 건축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석조전 건축을 제안하고 참여했는데, 석조전이 완공되던 해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본래 1층과 2층은 접견실 및 홀로 사용하고, 3층은 황제의 침실과 욕실 등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만든 건물이라 합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인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이곳 석조전에서 열렸고, 한국전쟁 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석조전 서관은 1937년 일본인들이 세워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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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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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전 서관>  

 

(10) 정관헌(靜觀軒)

 

정관헌은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또 가끔 연회를 베풀던 건물로, 1900년에 지어졌습니다.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하는데, 발코니를 둔 벽돌 건물로 서양식 건물이지만 동양식 목조 건물 양식이 일부 섞여 있어 특이한 느낌을 주는 건물입니다. 발코니 내부의 석조 기둥은 유럽식 기둥이고, 발코니 외부의 목조 기둥과 테라스의 문양은 동양적인 문양이 들어 있습니다.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 이곳에서 자주 커피를 마셨는데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에 있던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배달시켜 마셨다고 합니다. 테라스의 문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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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 

 

(11) 중명전(重明殿)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있던 때보다 크게 축소된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는 덕수궁을 제멋대로 분할해 그 땅을 외국 공사관에게 주기도 하고 일반인들에게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현재의 덕수궁 밖에는 과거 덕수궁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중명전(重明殿)은 본래 덕수궁 안에 있던 건물이지만,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현재는 덕수궁 밖 미국대사관 부근에 있습니다. 1901년에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황실도서관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 세웠을 때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고 하는데,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이 건물이 고종의 임시 집무실로 쓰이면서 이름을 중명전으로 바꾸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조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된 곳이 바로 이 중명전이라 합니다. 그리고 1907년 고종이 몰래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건물도 이 중명전이라 합니다. 이 중명전도 일제시대에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주인이 바뀌다가 문화재청에서 사들여 복구한 뒤 2010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중명전 주변에 만희당, 흠문각, 양복당, 경효전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고 또 옛 경기여고 자리에는 선원전을 비롯해 사성당, 흥덕전, 흥복전, 의효전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