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임금 단종과 조선의 번째 쿠데타 계유정난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의 장남 문종은 병약한 사람이었다. 문종은 재위 내내 병에 시달리다가 재위 2년여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452 5, 문종이 승하하자 아들 단종이 즉위했는데 고작 12살의 어린아이였다. 관례에 따라 어린 임금이 20살이 때까지는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해야 했는데, 어린 단종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는 천애고아여서 수렴청정을 왕실의 어른도 없었다. 자연히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단종의 삼촌이었던 야심가 수양대군은 이들과 갈등을 빚었다.

 

수양대군 정권을 움켜쥐다, 계유정난

 

1453 10 10 ,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의 계책에 따라 양정 휘하의 무인들을 동원해 김종서를 살해하고, 바로 입궐해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보고를 단종에게 올렸다. 그리고 대신들을 입궐시켜 미리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등을 죽였다.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사건이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즉위한 1 5개월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종서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 비난의 목소리가 있긴 했어도 김종서가 역모를 도모했던 흔적은 없다. 안평대군 역시 마찬가지로 김종서와 친분을 유지했고 성격이 호방해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모이긴 했어도 역모를 도모하진 않았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적들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56년만에 그의 손자인 수양대군이 같은 형태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계유정난으로 죽은 김종서, 황보인은 문종의 고명대신들이었다. 고명(顧命)이란 임금이 유언으로 남긴 부탁을 뜻하는 말이다. 문종은 죽음을 앞두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어린 아들 단종을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김종서 등은 왕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이었으로 이들에게 감히 맞서려 드는 사람이 없었고, 그로 인해 김종서의 힘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김종서의 힘은 당시 황표정사(黃票政事) 제도를 보아도 있다. 황표정사란 관직에 사람을 뽑을 후보자 명의 이름에 황색 표시를 해서 올리면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는 제도를 말한다. 김종서는 여러 후보자 명의 이름에 황표를 찍어서 어린 단종에게 올렸고, 단종은 그대로 인사를 시행했다. 모든 인사권이 김종서의 안에 있었던 것이다.

김종서의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부른 원인이었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황표정사를 문제 삼기도 했다. 당시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을 비난한 세력이 없었던 점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김종서에 대한 반감도 크지 않았나 짐작할 있다. 아무튼 세종의 명을 받아 두만강변에 6진을 개척했던 호랑이 같은 인물 김종서는 그렇게 덧없이 죽고 말았다. 그러나 1746(영조 22) 영조 임금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종서의 역모죄를 사하고 그를 복권시켰다. 이는 김종서가 실제로 역모를 꾀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의 4 명필, 안평대군

 

계유정난으로 죽은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화에 모두 능해 삼절로 불렸는데 특히 글씨를 조선의 4 명필로 꼽힌다. 안평대군은 6진을 개척할 김종서를 도와 여진족과 싸웠던 인연으로 김종서와 각별한 사이였다. 안평대군은 김종서와의 친분을 활용해 정치적인 입지를 점차 넓혀 형인 수양대군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안평대군이 살던 별장인 부암동의 무계정사(武溪精舍)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 해서 왕이 땅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측은 이를 문제 삼기도 했고, 안평대군을 귀향 보낸 무계정사를 철거해 버렸다. 안평대군이 정말 왕위를 욕심 냈었는지는 길이 없지만,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도 안평대군은 권력의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가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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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대군의 집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데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안평대군이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때문이다. 하루는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걷는 꿈을 안견을 불러 꿈을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러자 안견이 3일만에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는데 그림이 바로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은 그림에 직접 발문을 적었고,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당대의 실력자와 문인들이 모두 그림에 찬문을 넣었다. 안평대군의 대단한 위세를 느낄 있는 대목이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안평대군은 스스로도 예술을 좋아했지만 예인을 아끼기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안견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견은 안평대군의 불행한 최후를 예감하고 안평대군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안견이 안평대군을 버린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어느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귀한 먹을 얻자 안견을 불러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안평대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먹이 없어졌다.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묻자, 안견이 자신도 자리를 비워 먹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안평대군은 먹을 찾기 위해 집안을 뒤졌는데 결국 먹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안견이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안견의 옷소매에서 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절교를 선언했고, 일로 계유정난 안평대군의 측근들이 피해를 입을 안견은 무사했다. 일을 두고 안견이 안평대군에게 버림받기 위해 고의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말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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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은 조선 초기의 문화 예술을 이끌던 거목이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을 후원하고, 고사관수도를 그린 강희안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자신 역시 글과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사람으로, 이것이 화가 되어 형인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