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자들의 ()’를 세우다, 단종복위운동

 

 

계유정난 이후 정권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가고 어린 단종은 허울뿐인 임금이 되었다. 결국 단종은 1455 6, 자신을 돌봐주던 삼촌 금성대군마저 유배길에 오르자,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킨 지 1 8개월만에 임금으로 즉위했다. 이 사람이 조선의 제6대 임금 세조이다.

그라나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문제가 달라졌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것은 고명대신과 왕실세력의 싸움이었지 왕을 바꾸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 앉히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것은, 비록 어리긴 해도 어엿한 왕을 몰아낸 꼴이 된 것이다.

 

1차 단종복위운동, 사육신 사건

 

이런 까닭으로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혀야 한다는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첫 번째 단종복위운동은 1456(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서 일어났다. 이들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들로, 세종의 장손인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장남인 문종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염려해, 이들을 따로 불러 손자인 단종을 부탁한다는 고명을 남겼다고 한다.

이들은 명나라 책명사의 연회 자리에 무장 유응부가 별운검으로 임명되자, 이때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별운검(別雲劍)이란 왕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칼을 차고 왕을 호위하는 무관이다. 마침 유응부가 별운검에 임명되어 이 기회에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회가 시작되기 전, 한명회가 갑자기 창덕궁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폐지시켜 버렸다. 한명회가 이들의 계획을 눈치 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러자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던 김질이라는 자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배신하여 밀고함으로써 이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모진 국문을 받은 뒤 모두 처형되었고 시체는 처형장인 새남터에 버려졌다.

이때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을 사육신이라 부르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여섯 사람이다. 최근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는데,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도 사육신과 같은 충신이었음을 인정했다. 흔히 사육신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사칠신이 된 셈이다.

아무튼 이들의 계획이 실제로 치밀하게 준비되었는지는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연회장에서 세조를 죽이는 것만으로 간단히 단종을 복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조정은 세조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세조가 시해되었다 해도 세조의 세력들에 의해 단종이 아닌 다른 이가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 크다. 사육신이 그런 상황을 몰랐을 리가 없다. 어쨌든 사육신 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단종복위운동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남터에 버려진 이들의 시신은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수습을 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는 한강변 노량진의 낮은 언덕 위에 이들의 묘가 있으며, 이 일대를 사육신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묘역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각각 네 기와 세 기의 묘가 있다. 사육신 묘역에 7기의 묘가 있는 것은, 1970년대에 김녕 김씨 문중에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야 한다며 이곳에 김문기의 허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성삼문의 시신을 전국에 흩어서 매장했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논산에는 성삼문의 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하나 있다. 이곳에 성삼문의 시신 일부가 묻혀 있다고 해서, 이 무덤을 일지총(一肢塚)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묘가 성삼문의 묘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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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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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의 일지총. 이 묘가 성삼문의 묘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묘 앞에 사당까지 세워 성삼문의 제사를 올리고 있다.>


단종을 다시 즉위시키려 했던 제1차 단종복위운동은 오히려 단종의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 앉혔지만 단종을 지극히 대했다. 왕조실록을 보면 경복궁에 머물던 세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창덕궁에 있는 단종을 찾아가 문안을 올렸고, 사냥을 나갈 때면 단종과 함께 나가곤 했다. 그러나 사육신 사건 이후로는 세조가 단종을 찾아가 문안을 올리거나 사냥을 함께 나갔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육신 사건 이듬해인 14576, 송현수 등의 역모사건이 터지자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 보냈다. 단종의 유배와 관련해 세조 실록에 있는 세조의 교지는 이랬다.

 

전날 성삼문 등이 말하기를 상왕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함께 말하기를, ‘상왕도 종사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하고, 여러 달 동안 청하여마지 않았으나 내가 윤허하지 아니하고 처음의 마음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심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로서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과 종사의 중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복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 의식을 후하게 봉공하여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라.

 

세조의 솔직한 마음이 담긴 글이다. 단종을 지켜주려 했으나 단종으로 인해 역모가 계속되니, 종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종을 유배시킨다는 말이다. 마지막에는 단종을 후하게 대접하고 목숨을 보존케 하리라는 말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세조는 결국 자신의 이 말을 지키지는 못했다.

단종이 유배된 곳은 영월의 청령포였다. 청령포는 영월읍의 서쪽을 흐르는 서강이 삼면을 가로막고 나머지 한 쪽은 험한 산이 솟아 있는 천혜의 유배지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배편 하나여서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자연 그대로의 감옥 같은 곳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집인 단종어가를 복원해 놓았고, 단종이 부인 정순왕후를 그리워했다는 망향탑과 노산대가 있다. 그러나 청령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울창한 소나무숲이다. 죽죽 솟은 황장목이 큰 숲을 이루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이 소나무숲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가 관음송이다. 관음송은 약 600년 정도 된 소나무라 하는데, 청령포에서 단종의 우는 모습을 보고 또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란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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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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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관음송>  

 

그러나 단종은 청령포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해 여름 서강에 큰 홍수가 나 청령포에서 2개월 가량 머물던 단종은 영월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월 읍내에는 동헌 자리에 관풍헌과 자규루가 복원되어 있다. 자규루(子規樓)는 본래 매죽루(梅竹樓)였는데, 단종이 이 누각에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었다 해서 자규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와 / 외로운 몸과 그림자 푸른 산중에 있네

밤이 가고 와도 잠 이루지 못하고 / 해가 가고 와도 한은 끝이 없네

두견새 소리 끊기고 새벽 달빛은 흰데 / 피눈물 지는 골짜기에 지는 꽃이 붉네

하늘도 애닲은 하소연 듣지 못하고 / 어찌 시름 젖은 내 귀에만 들리는가 (단종, 자규시)

 

17살의 어린 사내아이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애절한 시이다. 단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시를 보아도 단종이 총명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미 단종의 안타까운 운명은 서서히 단종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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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관풍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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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규루>  

 

2차 단종복위운동, 금성대군 사건

 

사육신 사건이 벌어진 지 2년만인 1457(세조 3), 2차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순흥으로 유배되었던 단종의 삼촌이자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순흥목사 이보흠 그리고 이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금성대군의 노비가 관가에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2차 단종복위운동인데, 이때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들을 기리고 제사를 올리는 금성단이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처형되었는지 금성단 옆을 흐르는 죽계천에 그 피가 무려 20리나 흘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금성단에서 죽계천을 따라 20리 떨어져 있는 마을 이름이 피끝마을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아마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던 모양이다.

금성단 건너편에는 1542년에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이 있다. 이 백운동서원의 죽계천에는 붉은 글씨로 ()’ 자가 새겨진 경자바위가 있다. 이 경자바위에는 전설이 하나 전하고 있다. 백운동서원을 세웠을 때 금성단에서 처형된 유림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 유생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결국 주세붕이 그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 자를 새기고 제를 지내자 울음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후세의 사대부들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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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금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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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경자바위>  

 

단종을 위한 복위운동이었지만 2차 단종복위운동은 결국 단종의 죽음을 불렀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있은 지 한 달 뒤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결국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5년만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죽음을 맞았다.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서 모두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만을 적었다는 조선의 사관들이 이때만큼은 거짓을 적은 것이다. 상왕을 죽였다는 사실이 후세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를 사관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약을 가져갔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사약을 주지 못하고 있자 복득이라는 노비가 활 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말이 전한다. 단종이 죽자 금부도사로 사약을 가지고 갔던 왕방연은 안타까운 마음을 시조로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

 

영월에는 단종의 릉인 장릉이 있다. 그러나 이 장릉이 왕릉으로 인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종이 시해되었을 때 죽은 단종의 시신은 그대로 강가에 버려졌다고 하는데, 두려운 나머지 아무도 그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에 암장했다고 한다. 그후 단종의 복위가 논의되면서 1541(중종 36) 영월군수 박충원이 단종의 묘를 찾아 제사를 올렸고, 1698(숙종 24)에야 비로소 단종이 복권되어 단종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아 능으로 조성되고 왕실의 제례에 따라 제를 올리게 되었다.

조선의 왕릉은 모두 한양 100리 안에 조성되어 있는데, 단종의 장릉만이 멀리 떨어져 있다. 또 능침과 정자각의 위치도 왕릉의 형태를 벗어나 있다. 이는 단종의 장릉이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뒤에 태백산으로 가서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태백산 천제단 아래에 단종비각이 있어 매년 제를 올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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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 

 

단종복위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은 모두 덧없는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만고의 충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사육신은 조선의 대표하는 ()’의 상징이 되어, 조선 유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에게 ()’, 옳지 못한 것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바로잡겠다는 정신이었다. 이들 사육신이 ()’를 세움으로써 뒷날 임진왜란과 일제 침탈기에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했고, 3.1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게는 이들이 큰 부담이기도 했다. 세조 이후의 임금들은 모두 세조의 자손들이었고, 사육신을 충신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조상인 세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조선 유학자들의 끈질긴 상소로 숙종은 1681(숙종 7) 이들을 모두 복권시키고 이들의 묘가 있는 노량진 언덕에 민절서원을 세웠다. 그후 정조는 1782(정조 6) 신도비를 세워 이들의 충의를 기렸다. 사육신은 ()’를 위해 능지처참 당한 지 200만에 복권되었고 다시 100년이 지나서야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사육신의 기개는 현재에까지 조선 유학자들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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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절사. 현재 사육신 묘역에는 사육신의 의를 기리는 사당인 의절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