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동생인 경원대군이 조선의 13 임금으로 즉위했다. 사람이 명종으로, 명종은 고작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그러자 관례에 따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고, 실권은 문정왕후와 그의 남동생인 윤원형, 소윤 일파에게로 돌아갔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정권을 잡은 윤원형의 소윤파는 가장 먼저 윤임의 대윤파를 제거했다. 과정에서 인종 중용되었던 사림들 윤임의 대윤파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 사건을 을사사화라 부른다. 1545(명종 원년) 윤원형은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과 함께 대윤파인 윤임, 유인숙, 유관을 모함해 죽였다. 이들은 뚜렷한 죄목도 없이 죽음을 당했다. 윤임은 구체적인 정황도 없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죽었고, 유인숙은 모후가 조정에 임어할 없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유관은 명종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 한마디로 미운털이 박혀서 어쩔 없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소윤파의 소인배들 틈에 대학자인 회재 이언적이 끼어 있었다. 당시 이언적은 사림이 화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청해, 문정왕후로부터 사림의 화는 없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았지만, 문정왕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윤임 등이 죽은 후에 그대로 끝날 같던 일이 다시 불거지고 것이다. 발단은 경기관찰사 김명윤이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에 관한 상소 때문이었다. 김명윤은 상소에서, 윤임이 명종 대신 계림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계림군이 이를 몰랐을 없으므로 계림군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상소로 계림군을 잡아 죽이고 계림군과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는데, 이때 윤임과 가까웠던 사림파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사건이 바로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는 정권을 잡은 윤원형의 소윤파가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해 억지로 조작한 사건으로,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훗날 모두 신원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을사사화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후로도 윤임과 친분이 있거나 문정왕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을사사화의 여파로 2 뒤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윤임과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 사건이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이때 사림들이 화를 당해 정미사화라 부르기도 한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사소한 벽서 장으로 시작되었다.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에 붙어 있었다는 괴문서 장을 명종에게 들고 것이다. 괴문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여주(女主)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절 그믐날.

여주(女主) 말할 것도 없이 문정왕후를 지칭하는 말로, 문정왕후와 이기 등의 간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글이다.

괴문서를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은 대뜸 윤임의 잔당들에게 원인을 돌렸다. 윤임의 잔당들이 남아 사악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지만, 이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다음날 송인수, 이익빙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 권벌 등은 유배되었다. 사건이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후세 사학자들은 사건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로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조정을 휘두를 있게 되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에 독락당이라 불리는 고택이 있다. 고택의 주인이었던 회재 이언적이 바로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의 환난을 감내했던 사림의 거목이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었던 인물이다.

이언적은 1491,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의 양동민속마을에서 태어났다. 양동민속마을은 이언적의 외가로 이언적은 외삼촌인 손중돈에게 글을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사림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었다. 이언적은 1514(중종 5)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 요직을 두루 거치고 1530(중종 25)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경주로 돌아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후 다시 관직에 나가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과 이조, 형조, 예조판서를 지내는 주요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1547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 좌찬성으로 있으면서 윤임과 사람의 치죄에 관여했다. 사림의 거두였던 이언적이 을사사화 사림의 치죄를 맡았던 것이다. 일로 훗날 율곡 이이에게, 바른 말로 그릇된 일에 항거하지 못한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언적은 직책상 어쩔 없었던 측면이 있다. 을사사화는 훈구 세력이 사림 세력을 축출한 사건이 아니라, 윤원형 일파가 윤임 일파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윤임과 가까운 사림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었다. 당시 이언적은 윤원형과 윤임 어느 쪽과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좌찬성이란 고위직에 있어 사건과 무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을사사화 윤임 등의 사사를 명하는 자리에서 이언적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임금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성명이 일단 내려지면 감히 다시 청할 없으니 짐작하여 처벌하소서.’

이언적은 을사사화의 희생을 줄이려 했으나 을사사화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뜻대로 진행되었고, 이언적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2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윤원형 일파는 이언적마저 제거했다. 이때 이언적은 강계로 유배되어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강계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7년간 이언적은 학문에 몰두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조선의 성리학 정립에 자취를 남겼다. 이언적은 주리론을 확립해, 퇴계 이황에 의해 완성되는 영남학파 주리론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의 사랑채 건물이다. 집에는 현재까지도 이언적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 안채에는 함부로 들어갈 없다. 그러나 대문 좁은 길을 따라 계곡으로 나가면 계곡 옆에 우뚝한 독락당 건물을 있다. 계곡이 자개천으로 그리 크진 않지만 의외로 멋진 계곡이다. 계곡 옆으로 기둥을 내린 독락당 건물이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혼란했던 세상을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던 대학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독락당으로 가는 길에는 이언적을 배향하는 옥산서원이 있다. 독락당 앞을 흐르는 자개천이 옥산서원으로 이어지는데, 옥산서원 앞에서도 제법 멋진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

 


  <독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