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끝,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육지에서의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바다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해 수군 재건을 시도하고 있었고, 부산에 있던 왜의 수군은 조선의 서해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바다에서 일촉즉발의 전선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명량해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와해된 수군의 재건에 나섰다. 칠천량 전투에서 전선 12척을 가지고 도망쳤던 배설을 찾아 전선을 회수하고 멀리 해남 우수영으로 들어가 배 한 척을 더해, 전선 13척으로 수군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전선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군사의 수도 부족했고 여러 장비도 완전 고갈된 상태에서 어렵게 수군을 복원해야 했다.

왜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왜의 수군은 서해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남해안을 따라 서진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해남에 있는 것을 알았지만 고작 배 13척을 지닌 이순신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이순신은 왜 수군 300여 척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자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왜 수군이 다가오자 울돌목으로 들어가 왜 수군을 좁은 명량해협으로 끌어들였다. 왜의 수군은 이순신을 향해 거침없이 덤벼들었고, 이순신 역시 대담하게 배 13척으로 200척의 왜선과 백병전을 벌였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을 벌일 때 왜선과 거리를 두고 우세한 화포를 이용한 화포전 전략을 주로 구사했었다. 한산도대첩에서의 학익진 역시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펼친 전략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는 과감하게 백병전을 택했다. 화포를 사용하기에도 배의 수가 너무 모자랐던 것이다. 대신 이순신 장군이 노린 점은 울돌목의 조류였다. 울돌목은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고 거셌다. 그리고 순식간에 조류의 흐름이 반대로 바뀌는 특이한 해협이었던 것이다. 울돌목이란 이름도 빠르고 거센 조류가 우는 소리를 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울돌목의 좁은 물길은 왜선 200척이 앞뒤로 길게 늘어서게 만들었고, 이순신은 앞에 서 있던 왜선을 공격해 좌초시킴으로써 뒤의 왜선들은 갈팡질팡했고, 이때 조류의 흐름이 갑자기 바뀌자 왜선들끼리 부딪혀 깨졌고 왜의 수군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왜 수군의 명량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다시 부산으로 철수해야 했다. . 1597 9 16일에 있었던 이 해전이 명량해전으로 충무공의 3대 대첩의 하나이다. 이순신 장군은 13척을 배를 이끌고 200여척(왜선의 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의 왜 수군과 싸워 이겼던 것이다. 이 명량해전에 나서기 전에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에게 했던 말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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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에서 진도로 넘어가는 진도대교 아래 바다가 울돌목이다. 사진처럼 아주 좁은 해협이어서 대선단이 드나들기 어려운 해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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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우수영 터에서 바라본 울돌목. 평소에도 포말이 일 정도로 물살이 강한 해협이 울돌목이다.>


 

노량해전 


명량해전을 끝으로 전쟁은 깊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진격을 할 수도 퇴각을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경상도 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성에 들어가 장기 수성전에 돌입했다. 명군과 조선군도 가끔 왜성을 공격했지만 대규모 공격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큰 싸움을 벌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명량해전 1년쯤 뒤인 1598 9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은 급격한 내부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자 조선에 상륙한 왜장들이 급히 귀국을 서둘러 전쟁이 종식되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때 명의 수군과 함께 노량해협을 봉쇄해 귀국을 위해 순천왜성에 집결한 고니시의 부대를 틀어막았다. 순천왜성(왜교성)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려면 반드시 남해도 옆을 지나야 하는데, 이 길을 이순신 장군이 틀어막은 것이다. 고니시는 결국 부산에 있던 주력부대에 구원을 요청했고, 1598(선조 31) 11 19일 고니시의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왜선 500척이 노량해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이 왜의 대수군에 맞서 마지막 해전을 펼쳤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최대의 해전으로 밤을 세워 전투가 벌어졌으며, 조선 수군은 왜선 500척 중 450척을 부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전투가 벌어지는 틈을 타 고시니의 부대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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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해전도>

 

노량해전은 왜란 최대의 전투였지만 여러 미스터리를 낳은 전투이기도 했다. 첫 번째 궁금증은 이순신 장군이 왜 노량해전을 벌였는가의 문제이다. 그때 전쟁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왜군은 조건 없이 본국으로의 철수를 원했고 왜군이 돌아가면 전쟁은 그대로 끝나는 상황이었다. 바닷길을 그냥 열어 주었다면 왜군은 조용히 철수했을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철수하려는 고니시의 부대를 막아선 것이었다. 물론 침략에 대한 응징과 복수의 의미는 있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던 것이다.

두 번째 궁금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다. 노량해협에서 시작된 전투는 밤을 세워 다음 날 관음포에서 끝났다. 아마 조선과 왜의 수군이 뒤엉켰던 처참한 전투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런 처참한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지휘선을 적선에게 돌진시키고 스스로 갑옷을 벗은 채 직접 큰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의 이런 행동은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갑옷도 벗은 채 적군 앞에서 북을 치고 있었으니, 장군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이런 까닭을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무능함과 편협함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선조는 전쟁 영웅들을 두려워해서, 이들을 치하하기는커녕 이들을 처단하려 들었던 임금이다. 전설적인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을 역모죄로 잡아 죽인 것도 이런 연유였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결국 자살을 택했다는 추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남해도로 운구되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유해가 남해도로 들어왔던 자리가 바로 이락사이다. 이락사(李落祠)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이 떨어진 곳이란 의미다. 이락사(李落祠)에는 장군의 유허비가 서 있는데 이 유허비각에는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락사 앞에는 큰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비석에는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라는 글이 새져져 있다. 이 글은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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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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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포. 이락사에서 송림길을 따라가면 관음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첨망대라는 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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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 이순신 장군의 주력선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판옥선의 양쪽 옆에 화포를 설치해 화포전을 주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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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장군의 돌격선이었던 거북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영향

 

임진왜란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크게 흔들었던 큰 사건이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다시 내전에 휩싸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을 이뤄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가져온 여러 책자와 문화재와 강제로 데려간 도공 등을 통해 문화적 진보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전부터 혼란에 시달렸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조정의 기강이 문란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청나라에 밀려 멸망하고 말았다.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인구가 크게 줄었고 농지도 크게 줄어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많은 문화재가 피해를 입고 약탈을 당했다. 조선은 전쟁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