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을 꿈꾼 군주 효종

 

 

1649년 인조가 죽자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조선의 제 17대 임금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은 차분하게 북벌을 준비했다. 청나라를 쳐서 아버지가 겪었던 병자년 삼전도의 치욕을 갚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청나라는 중원을 제패한 뒤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 정책

 

효종은 즉위한 후 반청세력의 송시열, 이완, 송준길, 김상헌, 김집 등을 등용하고 친청세력인 김자점을 제거했다. 송시열은 윤선도와 함께 효종이 왕자 시절 효종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조정을 꾸리고 이완 등의 무장으로 하여금 군사력을 강화하게 했다.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해 어영청을 개편 강화하여 북벌 계획의 중심으로 삼고, 수어청과 금군도 개편했으며, 무기 개발과 군사 훈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훈련된 군사는 1654(효종 5) 1658(효종 9),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나선(羅禪)은 러시아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조선군이 청군과 함께 러시아를 공격했던 사건이다. 당시 러시아가 청나라의 흑룡강 부근을 자주 침범하자 청나라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요청해 함께 러시아를 공격했다. 이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 조선 조총수들이 각각 100명과 200명이 참전했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상당한 전공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계획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현실적으로 효종의 북벌 계획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당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할 때여서 군사력을 확충할 만한 재정이 부족했다. 그리고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들도 북벌에는 회의적이었다. 효종과 함께 북벌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서인의 거두 송시열조차 실제로는 북벌에 찬성하지 않았다. 1657(효종 8) 송시열이 효종에게 올린 시무책인 정유봉사(丁酉封事)에서 송시열은, 내치에 힘써 백성을 수고롭지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전쟁 준비에 백성을 내몰지 말라는 뜻이었다.

또 효종이 급사하기 전인 1659(효종 10) 3 11일에 있었던 두 사람의 기해독대에서도 효종이 북벌의 의지를 밝히자, 송시열은 효종의 뜻을 완곡히 반대했다. 효종의 북벌이 뜻은 옳지만, 성공 가능성에 자신이 없으며 내치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왕의 북벌 의지를 완곡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 증오심으로 전쟁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거의 소탕해 중원을 완전히 제패한 상태였다. 불안한 상태의 조선이 그 강력한 청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기해독대에서 효종은 10년간 준비를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송시열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대답은 마음 공부에 치중하시라는 말뿐이었다.

그 기해독대가 있은 지 약 2개월 뒤인 1659(효종 10) 5 4일에 효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실록에 보면 4 27일에 처음으로 효종이 머리에 종기를 앓아 약방의 진찰을 받았다. 그 종기가 갑자기 심해져 일 주일만에 죽은 것이다. 효종이 죽던 날 종기가 심해져 의원 신가귀가 종기를 앓는 머리에 침을 놓았는데 피가 멎지 않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벌을 꿈꾸던 강인한 군주 효종은 41세의 젊은 나이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당시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효종은 북벌 계획을 거의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효종이 강화했던 부대인 어영청, 수어청, 금군 등은 한양을 방어하는 군대였고, 백성들에게 성을 보수하도록 시킨 것을 보면, 효종은 북벌보다는 외침에 대비하려는 목적이 더 컸던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죽기 얼마 전 송시열과 독대했던 기해독대에서 10년을 준비해 북벌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사실이 효종을 북벌 군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해독대는 사관마저 물리치고 효종과 송시열 단 둘이 나눈 이야기이다. 이 기해독대에서 나눈 이야기는 효종이 죽은 뒤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공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해독대의 이야기도 실제 그런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다.

 

소중화사상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오랑캐로 여겼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화의 나라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적 문화적 근본이었던 명나라가 오랑캐의 손에 사라진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결과로 조선에서는 소중화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한족의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이 오직 세계의 중심이고 타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미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족의 명나라가 망하고 그 명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한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으니,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바로 소중화사상이다.

소중화사상은 사대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적이지 못한 사상이어서, 조선은 정치적으로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청나라를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망한 나라인 명나라를 계승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사고로, 명나라 황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만동묘나 대보단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예학이 중요하게 자리잡으면서 지나치게 예()를 강조하는 기형적인 나라로 변해갔다. 훗날 영정조 시대에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실학이 태동하기 전까지, 소중화사상은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사상이었다.

 

대보단(大報壇)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세워진 제단으로, 크게 보답한다는 뜻의 제단이다. 망한 나라인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으로, 매년 임금이 직접 이 제단에서 명나라를 세운 태조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신종 그리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청나라가 알게 되면 큰 평지풍파가 일어날 일이었지만 조선의 임금들은 명나라의 몰락을 아쉬워하며 대보단에서 제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 말 일제강점기 때인 1921년 일제가 이 대보단을 헐어 버려 지금은 없어졌다. 대신 대보단 자리에 새로 신선원전(新璿源殿)을 세워 옛 선원전에 모시고 있던 조선 임금들의 어진을 모셔다 놓았다.

만동묘(萬東廟)는 괴산의 화양계곡에 있는 사당으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화양계곡은 송시열이 말년에 머물던 곳으로, 송시열이 제자들에게 이곳 화양계곡에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올리는 사당을 세울 것을 당부해, 그 제자들이 세운 사당이다. 이곳에 화양서원이 같이 세워졌는데 훗날 이 화양서원의 횡포가 극에 달해서 대원군 때 서원 철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은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떠받들며 은근히 청나라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조선만이 명나라의 중화사상을 이어갈 수 있는 소중화의 나라라는 소중화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커다란 환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의 조선은 이미 그런 정도의 현실 감각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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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신선원전. 이 자리가 대보단이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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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 만동묘. 조선 후기의 사대사상은 청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망한 명나라를 향한 것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