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의 등극과 노론 소론의 당쟁

 

 

1720년 숙종이 죽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조선의 제20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경종은 부왕 숙종이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의 생모를 죽이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핍박하는 노론 속에서 힘겹게 왕권을 지켜야 했던 경종은 병약한 사람이었다.

 

병약한 임금 경종

 

경종은 1720년 부왕인 숙종이 승하하자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해 부왕인 숙종의 근심을 샀던 인물이었다. 경종이 세자였던 1717, 숙종은 세자가 병약하다는 이유로 연잉군(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후에 영조가 됨)으로 하여금 세자대리청정(세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시켰다. 세자가 어찌될지 모르니 연잉군에게도 세자 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며 세자를 압박했다. 장희빈의 사사에 큰 역할을 했던 노론의 입장에서는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즉위한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이 죽고 세자가 경종으로 즉위했고, 이 일은 노론에게 사활을 건 싸움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경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이 일부 있었지만 노론의 힘을 당할 순 없었다. 노론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경종을 몰아붙였다. 경종이 자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해, 즉위 이듬해인 1721년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이는 타당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이 없는 왕이 병약하니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그럴 경우 보위를 이어갈 사람을 미리 정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론의 압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종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 노론은 곧장 경종이 병약하니 세제로 하여금 세제대리청정을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경종이 뒤로 물러나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정무를 보게 하겠다는 뜻으로, 비록 왕이 병약하긴 해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젊은 왕에게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힘이 없던 경종은 세제대리청정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소론 측의 반대와 상소가 빗발쳐 일단 세제대리청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후로도 노론은 계속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했고, 소론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경종과 소론의 반격, 신임사화

 

노론의 계속된 무리한 요구는 결국 화를 부르고 말았다. 노론이 계속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하는 것은 임금을 능멸하고 종사를 어지럽히는 짓이라는, 소론 측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소론 측의 주장과 상소가 이어지자, 경종은 그때까지의 우유부단했던 태도를 바꿔 노론을 처단했다. 1721(경종 1) 12, 당시 노론 4대신이라 불리던 이이명, 이건명, 김창집, 조태채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으로 정권을 바꾸는 환국을 단행한 것이다.

노론의 수난은 노론 4대신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1722(경종 2) 3, 목호룡이란 자가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고변을 함으로써 더 큰 풍파가 불어닥쳤다. 목호룡은 당시 유명한 지관으로 풍수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목호룡은 처음에 노론 사람들과 가까웠는데, 노론 4대신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보고 소론 측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경종은 즉시 목호룡이 지목한 자들을 잡아들였다. 이 일로 노론의 피해는 엄청났다. 죽은 자가 70명을 넘었고 유배된 자가 100명을 넘었다. 유배되었던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이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에 걸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 또는 신임옥사라 부른다.

신임사화의 원인은 노론이 무리하게 연잉군을 추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임사화의 피바람이 불어닥칠 때 연잉군도 무사할 순 없었지만, 연잉군은 이미 세제였고 왕실의 후손이 없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2년 뒤 경종이 죽자, 연영군은 영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병약했던 경종은 재위 4년만에 숨을 거두어 재위 기간에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