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1898년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대한제국은 한동안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강대국들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해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일본과의 전쟁에서 잇단 패배를 겪음으로써, 전쟁 보상비만으로 나라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서구 강대국들의 침탈로 청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어, 조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 동북아의 패권국이 되다, 러일전쟁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무렵인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의화단 사건이란, 청나라의 의화단이란 결사조직이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의미)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 그리고 기독교 세력을 공격했다. 이에 중국 민중들이 합세해서 중국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1900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자국의 공사관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청나라를 공격해 북경을 함락시켜 버렸다. 청나라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또 한 번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이때 러시아는 자신들이 이권을 가지고 있는 동청철도(하얼빈과 대련을 잇는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1900년 만주를 점령했는데, 연합군이 청나라에서 철수한 후에도 계속 군대를 만주에 주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1903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반을 차지하려 들었고, 일본은 일단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지배권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러시아에게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은 1902년 이미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었고, 미국 역시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와의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9042월 해군을 동원해 제물포와 요동의 러시아 해군을 공격해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12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던 큰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1905년까지 길게 이어졌지만 결국 일본이 승기를 잡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와 만주 남부 일대의 지배권을 얻고 러시아에게 사할린 남부까지 할양 받았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일본을 지원해, 러일전쟁이 끝나기 두 달 전인 19057월 일본과 카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의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일본의 조선 점령을 서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19059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다른 열강들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지배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다, 을사늑약

 

고종은 어지러운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외세에 의지해 살아 남으려는 정책을 폈다.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에 기대서 조선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가 시해 당하는 처참한 사건을 겪어야 했고,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야 했던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19051117일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을사늑약(을사조약이라고도 함)을 체결해야 했다.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에 있던 외국인 공사관들은 모두 철수했고,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세계 외교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나라가 된 것이다.

 

고종은 끝까지 을사늑약의 체결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특사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을 궁으로 불러들여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는 가운데 일본군 헌병들이 칼을 차고 어전회의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고종과 대신들은 을사늑약의 체결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은 체결의 수락을 요구하며 다시 어전회의를 열었고, 고종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약 체결의 찬반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중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이렇게 다섯 명이 찬성의 뜻을 밝혔고,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은 끝까지 반대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승인만을 받은 채 을사늑약을 공표했다. 이때 조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명의 대신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른다.  

 

을사늑약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황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이에 찬성한 대신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목놓아 대성통곡하노라)’이란 사설을 쓰고, 다음 날인 1120일자 신문의 발행부수를 크게 늘려 신문을 배포하려 했는데, 일본 경찰이 새벽에 신문사를 급습해 황지연과 직원들을 체포하고 황성신문을 정간했다. 그러나 이미 일부 신문이 배포된 상태였고, 다음 날인 1121일에 대한매일신보가 장지연의 사설을 신문에 실어서 전 국민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의 자살이 잇따랐고 의병이 일어났지만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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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본래 경운궁 안에 있던 건물인데, 일제가 민간인에게 건물을 팔았고 경운궁이 복원될 때 축소 복원되어 지금은 경운궁 밖에 있다. 1층에 을사늑약에 대한 자료를 잘 정리해 놓고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과 한일합병

 

을사늑약 2년 뒤인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밀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으로 이들은 일본 몰래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에서 이들은 세계 각국의 대표단에게 자신들이 한국 대표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다른 나라들을 이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이미 다른 나라들이 을사늑약을 공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외교권 없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 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계 언론을 상대로 일본의 부당한 침략과 조선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 역시 개인적인 호소에 그칠 수밖에 없어, 이들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헤이그에서 밀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준이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이준이 분기를 이기지 못해 할복자살했다는 뉘앙스의 보도를 내보냈고, 이 보도로 인해 전국이 다시 들끓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오보였다. 이 신문들은 이준이 헤이그에서 병사한 것을 알았음에도 할복자살한 것처럼 거짓 보도를 한 것이다.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언론이 의도적으로 거짓을 보도하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행위임에도, 이들은 민족적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해 거짓 보도를 한 것이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병사했다는 사실은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실을 검토한 뒤 분사(憤死, 분을 못 이겨 죽음에 이름)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준의 죽음을 지켜본 이위종의 증언에 따르면, 이준은 죽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의식을 잃은 듯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라며 가슴을 쥐어뜯다 죽었다고 한다. 이위종의 증언에 따르면, 이준은 보기 드문 열사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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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 열사 묘. 북한산 자락에 이준 열사의 묘역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졌다.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신문 보도가 나가자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고종을 경운궁에 남겨둔 채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때 순종은 고종이 머무는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부황제인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그후 고종은 덕수궁에서 12년을 더 산 뒤 1919년 덕수궁에서 승하했고, 이로서 덕수궁도 궁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잇따라 조선을 압박하는 조치들을 취해서 조선을 더욱 무기력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190910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그후 조선통감이었던 데라우치는 몰래 이완용과 조선합병을 상의하고, 1910829일 순종을 불러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친 후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해 버렸다. 이완용은 을사늑약에 이어 한일합병에도 일본을 도와 대표적인 매국노가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순종의 황비였던 순종효황후가 순종의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었는데, 순종효황후의 삼촌이었던 윤덕영이 감춘 옥새를 빼앗아 조약에 날인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윤덕영이 순종을 협박해 조약에 옥새를 찍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 일로 이완용은 백작의 작위를,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각각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

1392년 개국한 조선은 27명의 왕과 황제를 낳고, 수많은 영광과 좌절을 뒤로 한 채 519년만에 나라의 운명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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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전통찻집. 갑사 계곡 옆에 서 있는 잘 지어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본래 이름은 간성장으로 윤덕영의 별장이었다. 공주의 부호였던 홍원표가 당시 돈으로 4만원을 들여 윤덕영에게 지어준 집이라 한다. 윤덕영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자신이 마치 처사인 양 행동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기 전에 죽어서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