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섬진강

 

 

10섬진강백리길 2코스(사진관).jpg


삐죽 봄꽃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매년 저는 섬진강 주변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닙니다.

섬진강변에서 산수유꽃, 매화, 벚꽃, 배꽃이 마구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죠.

열흘쯤 전에 섬진강을 따라 평사리에서 화개까지 걸었고,

지난 목요일에는 구례 사동마을에서 누룩실재를 넘어 섬진강변 유곡마을까지 걸었고,

그제는 섬진강을 따라 평사리에서 하동읍내 송림까지 걸었습니다.

내일도 평사리에서 하동 송림까지 걸어야 하고

토요일에는 화개천 십리벚꽃길을 따라 섬진강변 화개까지 걸을 예정입니다.

전라도 식으로 말하자면, 섬진강을 허벌나게 들락거리며 초봄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그제는 섬진강변의 벚꽃을 만나러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더군요.

11km 벚꽃길에서 꽃을 피운 벚나무는 딱 한 그루였습니다.

대신 하루종일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 봄비에 색이 짙어지는 풍경을 보며 왠지 가슴이 시원해지더군요.

평사리에서 버스를 내려 걷기 시작했는데

비 속을 자박자박 걷는 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제가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비에 젖은 섬진강 풍경이 더없이 서정적이었습니다.

섬진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이었지만

섬진강 건너 백운산은 안개가 피어올라 봉우리가 자욱했고

강 주변 여기저기에 솟아난 봄풀과 봄 이파리들은 연둣빛 뭉게구름처럼 아련했습니다.

보슬비 소리까지 토닥토닥 울리며 유난히 초록빛이 짙었던 대숲에서는 초록빛 봄이 졸졸 샘솟는 듯했고

이슬처럼 봄비를 머금고 있는, 늦은 매화와 이른 복사꽃은 막 세수를 끝낸 여인의 얼굴처럼 싱그러웠고

이제 숨을 쉬기 시작한 버들강아지만한 목련 꽃망울도 비에 젖은 채 나뭇가지에 가득이었습니다.

그 섬진강 길을 걸으며 마음 속 긴장의 매듭이 저절로 탁 풀리는 듯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봄비에 촉촉하게 젖은 섬진강 풍경이 그대로 제 가슴에 스며들었기 때문이겠죠.

비록 벚꽃은 피지 않았지만 저는 올 봄 최고의 풍경 속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맑은 하늘에 벚꽃이 피었다 한들

그제 걸었던, 봄비에 젖은 섬진강 풍경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이제 벚꽃이 피고 지면 기온도 올라가고 하늘도 맑아져서 완연한 봄이 옵니다.

섬진강변에도 봄의 생명력이 아우성치겠죠.

그제 비에 젖은 섬진강의 옅은 봄 풍경도 그렇게 좋았는데

봄이 아우성칠 때의 풍경은 얼마나 싱그러울지 몹시 궁금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벚꽃이 진 뒤에 보슬비 내리는 날을 택해

다시 한 번 섬진강을 걸으며 섬진강의 촉촉한 봄 풍경에 마음을 적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