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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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사의 가을>


며칠 전 구수천 팔탄길을 걷는데 흙길에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송이 안에는 윤기가 반지르르한 암갈빛 밤알이 들어 있더군요.

같이 걷던 임시연 씨가 밤알을 꺼내서 숲에 던져주더군요.

얘들아 이거 먹어라, 하면서 말이죠.

저는 그 밤알을 보며, 가을이 알을 깨고 나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하늘이 파랗게 높아져 있는 듯 보였습니다.

 

요즘 나뭇잎이 유난히 짙은 색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제 할 일을 마치고 곡기를 끊은 채 낙엽이 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죠.

몇 차례 가을비가 내리고 비 그친 뒤 기온이 떨어지면

온기가 쏙 빠진 선선한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청명해진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들이 둥둥 떠다니겠죠.

그리고 생을 정리하고 있는 나뭇잎들도 낙엽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게 됩니다.

 

사람들은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니 풍요의 계절이니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 가을은 탈속의 계절입니다.

사람들은 과수나 곡식의 열매를 수확했다고 풍요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지만

그것들은 식물들이 한 해의 일을 마치고 가진 것을 내려놓은 것들일 뿐입니다.

이제 풍성하던 초록잎도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산짐승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둥지를 다듬겠죠.

이렇듯 가을은 분주하게 보냈던 한 해를 정리하고 조용한 침잠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죠.

사람의 세상은 계절의 순환도 없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법도 없습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가야만 하죠.

더 얻기 위해서나 아니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겠죠.

하지만 꼭 그렇게 앞만 보며 살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뒤를 돌아보며 사는 것이 조금 더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일지도 모르죠.

저 역시 세상에 얽혀 사는 몸이라 계절과는 떨어져서 앞을 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봄이라고 씨 뿌릴 일이 없으니 여름에 풍성함을 즐길 수 없고

가을이라고 수확하는 것이 없으니 겨울에 침잠할 수도 없겠죠.

하지만 올 가을은 수확대신 탈속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한결 더 가벼워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스스로를 사랑하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요즘 바람이 불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