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주에서 사흘째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이 대개 그렇듯이 이번 제주 답사도 계획과는 좀 어긋나는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이틀이 더 남았고 또 지난 세 날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머체왓숲길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길 초입부터 저수지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정표나 안내글도 없고 안내센터는 사람도 없이 창고처럼 변해 있더군요.

이런 일을 하도 겪다 보니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공사중이니 다음에 오란 글만 앞에 세워놓았어도 

저처럼 공사판을 돌며 길을 찾으려는 바보들의 수고는 덜어줄 수 있었겠죠.


하지만 머체왓이 몽땅 낭패는 아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아주 우아하신 제주의 노부부를 만났거든요.

두 분도 머체왓숲길을 걸으러 오셨더군요

제가 궁금하셨던지 어디서 왔냐,  몇 살이냐, 하는 일이 뭐냐, 이런 걸 물으시더니 

제주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선 당당한 말투에도 유머를 잘 섞어 주셨고

할머니께서는 아직도 소녀처럼 수줍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두 분은 머체왓 입구에서 계속 즐겁게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길 끊겼으면 어때. 여기 이렇게 꽃도 많고 

오늘 날 좋아서 한라산이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데. 이런 날 많지 않아.

그러고 보니 한라산 바위벽의 주름까지 보이더군요.


머체왓을 떠나 화순의 곶자왈도립공원을 걸었습니다.

곶자왈에서 계속 제 머리 속을 맴돌던 생각은,

왜 나는 저 노부부처럼 마음을 내러놓지 못할까, 

대충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언듯 떠오르는 답은 뻔한 답이었죠.

뭐 가진 게 있어아 내려놓지. 내려놓을 것도 없는 놈이 괜한 시건방이라니.


그리고 숙소에서 술을 한잔했습니다.

술잔을 두 잔 놓고 혼자 주거니 받거니,

여행중에 혼술을 할 때의 제 습관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가 제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겠구나.

가진 게 없다는 생각이라도 가졌으니.

설령 그런 생각까지 버렸다 해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과 마음의 업은 버릴 수도 없는 것을.

그 업은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을.

그러니 가진 것 못 가진 것 구분없이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그래도 아직 저는, 뻔뻔한 건지 당당한 건지 모르겠지만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더 들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저를 믿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 제주 답사 기간에 제주의 날씨는 투명할 정도로 파랗습니다.

오늘 그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제주도청에 가서 세금 내고 가.  날씨세.

그래서 잠깐 생각했습니다.

혹시 세무공무원이셨나.


날씨가 좋아서인지 몸은 피곤한데 술은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쉬는 듯이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