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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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은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분명 봄이 와서 여기저기 꽃은 피어나고 있지만

왠지 봄의 그림자만 보고 있는 듯해서, 봄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난 주에는 부여 무량사에 다녀왔습니다.

바쁠 일도 없어 보이는 한적한 사찰에서

부지런을 떨어 일찌감치 연등을 길게 걸어 놓았건만

석가탄신일 행사는 기약 없이 연기되었습니다.

스님들은 저 긴 연등을 언제나 걷을 수 있으실지.

속세의 환란에 산중 스님들의 마음까지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무량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과 부도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단종의 죽음을 보고 세상을 등진 채 평생을 떠돌아다닌 분입니다.

그는 생의 끝자락에 무량사를 찾아 초상화를 하나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초상화 속의 김시습은 수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김시습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지어다.

오묘한 말입니다.

어리석고 나약했던 자신을 모질게 질타하는 중생의 말 같기도 하고

속세의 미혹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보살의 말 같기도 하네요.

 

이 날은 부여와 공주를 돌아다녔는데

어딜 가도 사람이 없어 황량했습니다.

바람만 떠도는 빈 들판과 가시처럼 야윈 가지를 파르르 떨고 있는 나무들.

간혹 지나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안쓰러운 외면.

온 세상이 활기차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 봄에

세상은 시름시름 병이 깊어져 이젠 안타까울 정도로 핼쑥하고 창백해졌습니다.

미래의 계획이라곤 단지 막연한 기대뿐인, 수많은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저 마스크만 꼭 쥐고 있을 뿐

감히 제 앞 일을 헤아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모두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참담한 침잠 속에서 다행히 저는 조금씩 차분해지고 또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의 일은 하늘의 뜻대로, 자연의 일은 자연의 이치대로 되게 하시길.

그러면 그 뜻과 이치에 따라 저는 묵묵히 제 일을 하겠습니다.

요즘의 제 마음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봄입니다.